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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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날,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강의 야경을 내다보다가 문득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 뛰어 내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세상은 핵폭발을 일으키듯 내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럽고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규칙과 질서는 사라졌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내가 생각하는 원칙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올 무렵 술이 깨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소설을 뒤적이거나 비디오를 봤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블루벨벳> 같은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 <씨네마 천국>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몇 번씩 다시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델리카트슨>만큼 인상적인 영화로 내 기억의 저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낮과 다른 밤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뱀파이어나 좀비를 다룬 모든 영화나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희망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요지부동인 현실에 대한 권태와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영원한 갈증! 바로 그것이 드라큐와와 뱀파이어와 좀비와 강시와 구미호와 귀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은 그야말로 좀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 소설이다. 좀비란 살아있는 시체를 말한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한 단어라 한다.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학으로 예술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예술과 과학을 경계짓는 따위의 논란은 이 소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좀비를 통해 현실 아닌 현실을 창조해 낸다. 현실과 상상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좀비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 경계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좀비 소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들이다. 좀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조연이며 부수적 역할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판타지나 SF로 보기는 어려운 애매모호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새로움과 낯선 기법으로 한국 소설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더 나오거나 김중혁의 관심이 좀 더 확장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의 얼개는 과거 회상 형식의 액자식 구성이다.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면서 만난 좀비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은 유일한 혈육이자 정신적인 지지대였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뚱보130과 수신감도가 0인 고리오마을에서 만난 홍혜정 그리고 그녀의 딸 홍이안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고리오 마을의 비밀이 밝혀지고 좀비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얽힌 실타래가 조금씩 풀린다. 추리소설 기법으로 고립되고 낯선 세계에 좀비들을 등장시켜 현실 밖의 세계와 현실의 접목을 시도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 만나는 좀비는 낯설고 이물스럽다. 공포와 전율의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민과 동경과도 거리가 멀다. 이 소설에서 좀비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좀비를 통해 비정한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충격이다. 작가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삶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작은 충격이 커다란 폭발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충격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도 있는 거죠.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 P. 12

인간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좀비가 되는 것도 살아있는 인간들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작가는 좀비와 대면한다는 것을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좀비를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당하는 좀비만 등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은 알아내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 답해 보자. 단순한 호기심은 본능에 가깝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구별이나 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홍혜정의 과거나 고리오마을에 대해 주인공이나 뚱보130은 알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소설적 진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욕망을 넘어 선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숨김과 감춤의 미학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진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진실한가, 아니 인간이 아닌 좀비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진실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진실은 그저 사실의 한 종류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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