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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레스터 서로우 지음, 현대경제연구원 엮음 / 청림출판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세계화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글로벌 스탠다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은 자본주의의 판정승으로 끝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세계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21세기를 풍미하고 있다. 이 거대한 공룡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냉전시대를 지나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지구상의 이념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이후 급속도로 미국의 패권시대를 이루고 있다. 유럽 연합이 탄생했으나 강력한 통일체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며 일본은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국제 사회보다 국내 경제에 몰두해왔다. 견제와 브레이크가 없는 미국의 독주는 세계화를 미제국주의화로 인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고 반미가 자연스런 현상으로 나타난다. 좌우의 이념대립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화에 대한 찬반논쟁은 이미 의미없는 논쟁이 되어버린 듯하다. 세계화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하는 구체적 현실태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사회 양극화는 어제 오늘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아젠다로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참여정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긴급 상황이라는 뜻이다. 올해 참여정부의 국정과제가 ‘양극화 해소’라고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모두 양극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 되었으나 무시되었거나 소홀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책과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여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구체적으로 내가 밥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다. 물론 그 단계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의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과 대책은 거의 전무하다는데 이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세계화는 정부가 나서서 막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기업이나 개인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레스터 C. 서로우라는 미국인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그의 입장과 견해에 한 줄 한 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세계화는 진행되고 있으며 제1세계 중심의 세계화와 제3세계 입장에서의 세계화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물론 세계화는 이제 선택의 문제를 넘어섰다는 가정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종속적인 산업구조와 자본의 지배구조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다. 국가의 권력은 오히려 축소되거나 위축되고 경제권력의 힘은 막강해지고 있다. 욕심, 낙관주의, 군중심리라는 자본주의의 유전요소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만이 세계화라는 글로벌 경제체제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입장에 일정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스스로 진화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의 문제를 떠나 이제 의도대로 구상하고 구축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도 좋겠지만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이 책을 아예 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이 스스로 진화하는 자본이라는 괴물이 모두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불안은 나만의 기우일까? 자본주의 넘어에는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의 사회 구조와 형태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역간 민족간 국가간 경쟁을 넘어선 자리에 소수만 살아남는 제도가 완성될 것인지 양극화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물결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는 수많은 논의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진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미시적 접근과 국가 경제 차원에서 구상할 수 있는 거시적 문제들이 혼재에 있는 복잡성이 문제 해결에 쉽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의 말대로 세계화를 전제로 그 이후의 ‘부의 지배’에 대해 관심과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도 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우울하고 마르크스가 말했던 자본주?우울한 유령들이 이제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몽상에 빠져본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가지자!”는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꿈꾸어왔던 인간들의 삶이 모습이 급격한 형태로 변화하는 전지구적 모습을 떠올렸을 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한 경제학자의 견해에 왈가왈부하는 것 이상의 논의와 대책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화에 동참하려면 새로운 환경에 뛰어드는 대담함이 필요하다는 서로우의 말은 다양한 문화를 가진 개인을 새로운 문화에 통합시킬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정사실로 세계화를 받아들인다면 최대의 부를 창출하려 한다면 그의 말처럼 “뛰어드는 사람이 더러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패배자일 뿐이다. 부는 용기 있는 자의 편이다.”라고 외치며 달려가야 하는 걸까? 부의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한 고민과 점검없이 달려온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도 맹목적으로 달려가야 하나?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우리들 모두의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각자 그리고 더불어 고민해 볼 문제다.


06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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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상식론 - 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하여
박호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오늘날 이른바 ‘좌파’의 자세를 아우르며,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래디컬(radical)’의 어원은, ‘뿌리째 파고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딕스’라는 라틴어다. 말하자면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지고드는, 단호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 P. 197

  강유원이 자신을 표현할 때 래디컬하다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색깔이다. 분명하고 군더더기 없이 그 사람을 알려줄 것 같은 매력이 있다. 한 인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래디컬한 인간이라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면 사상의 단면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잘못 표현되거나 독선에 빠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수준 문제다. 자신의 사상과 색깔을 분명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색깔만 논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늘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많은 탁상공론은 의미없다. 다소 과격하더라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의 육화된 이야기에 감동을 담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박호성의 논의와 코드(?)에 일단 동의하지만 강력하고 진심어린 주장은 공허함 울림으로 끝나버린다.

  박호성의 ‘우리시대의 상식론common sense for korean’은 일종의 편견이다. 수구꼴통 우파에서 본다면 좌파의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겠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 여기서 말하는 ‘건전’의 기준은 뭘까? - 사람들이라면 동의할만한 상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것이다 말하기는 참 어렵다. 우리 시대의 상식이라니, 너희들 시대의 상식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박호성은 좌파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다. 그래서 그는 ‘진보進步는 진보眞寶다.’라고 말한다. 進步가 眞寶라니, 우파의 반응이 궁금하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기준은 상이하다. 다만 일종의 편견이라고 전제할 때 몇가지 성향과 방향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그 단순한 논리가 오른쪽과 왼쪽이다. 물론 가운데도 있지만 그 가운데가 얼마나 위험하고 더러운 처세술인지 박호성의 말을 들어보자.

  지옥에서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장소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이승에서 위기의 순간에 중립만을 지켜온 죄인들을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단근질하는 곳이라고 불교 경전은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도 역시 힘든 문제가 발생하는 위험한 순간에 항상 중립을 지키며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런 위험도 따르지 않는 평화로운 순간에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사람 역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주의적 정의감과 무책임한 과격성을 가능한 멀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P. 279

  이 책에서 내가 읽어낸 화두는 이렇게 단순하다. 좌파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갈등하는 사회는 나쁘지 않다. 건전(?)한 우파와 참신한(?) 좌파의 갈등은 차라리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 멀었다는 비관론 대신 비참한 심정까지 든다. 아직도 이념공방과 과거사 문제, 국가보안법, 사학법 문제에 대한 해법과 시각이 제각각이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발전적인 갈등과 충돌은 요원해 보인다. 정치인들만의 싸움질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답답하다. 내가, 아니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을 수 있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박호성이 이야기하는 ‘상식’이 진짜 ‘상식’이 되는 날은 올 것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생활 철학과 해방과 통일, 한국 사회의 현주소, 이데올로기와 개혁, 전통과 진보, 자연정치론과 원시인 정치론을 거쳐 새로운 휴머니즘을 주창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신제국주의와 한반도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신휴머니즘’은 저자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나도 그곳에 가 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하던 시인의 말은 부정되어야 할까?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기적이며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유의 평등은 영원한 인간의 꿈일 뿐이다.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이상주의를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긴다고 믿는다. 성난 얼굴로 달려드는 기득권 세력의 얼굴을 웃는 얼굴로, 상생과 타협과 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 끊임없는 의문부호 남는 문제가 아니다. 기다는 지차제 선거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투표 방식을 들여다 보라. 그리고 정치인을 욕하지 말라. 네 이웃을 조심하고 내 입을 단속하라. 지독한 역설과 모순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박호성이 말하?우리의 사회의 문제와 상식의 의미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방위적으로 덤벼든 이 수많은 논점에 대한 해답은 멀기만 하다. 이론적 담론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대안의 유무만으로 비판을 비난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지만 이상적 논의와 상식 수준의 이야기들보다, 미래를 위한 큰 그림보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치열함을 배웠으면 좋겠다. 단적으로,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이 쏟아지고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무뇌아적 발상과 대책들을 살펴보라. 개혁과 진보의 이름으로 혁명이 이루져야 한다. 아니, 이름이야 어찌됐든 꿈을 꾸고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060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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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중간쯤에서 허리를 펴고 등 두드리는 시인이 함민복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가난한 삶에 대한 물결들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 그의 시는 더 아름다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어법과 바닥까지 드러난 감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우울씨의 一日>을 들고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그의 모습이 그랬다. 영종도 바다가에서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함민복은 세상의 잣대로 가난하다.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시인을 직업으로 선택한 그의 삶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 것은 그가 세상에 던지는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그가 가진 부드러운 힘과 <말랑말랑한 힘>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를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나를 위로하기 위해 꽃송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비에게 꽃이 필요한 것처럼 누구든 위로받을 대상은 존재한다. 사람마다 그것이 다르겠지만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일을 잊고 살았다. 내 마음을 ‘마음아’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한 채 눈을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나에게 던지는 시인의 서시는 그래서 아프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와 깊이가 유한한 생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지금 이 순간의 생을 확인하는 일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단순한 자연의 순리와 이치가 아니라 ‘꽃침’을 맞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드러움에 찔려 환해지고 선해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봄 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그러나 봄이 와도 쉽게 꽃침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침도 아니고 누구나 맞고 싶어하지도 않겠지만. 꽃침대신 흔들리지 않게 닻을 내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 닻의 힘은 ‘상처의 힘’이 되고 ‘상처의 사랑’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 작은 마을마다 집집마다 숨겨놓은 사람들에게 닻은 때때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큰 바다가 몰려올 때 사람들은 닻을 찾는 대신 정신을 놓아버린다.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침착한 이성의 닻을 찾기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닻은 닻일 뿐이다.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줄 수 있겠지만 ‘상처’를 치유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에 대한 미련과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걸 ‘그리움’이라 부른다.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그리움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06020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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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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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집착을 구별하지 못하고 질투와 배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복수와 사랑을 혼돈하는 영혼이 존재한다. 알콜 중독자와 스토커의 공통점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모든 책임과 이유를 타인과 세계에 돌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에게 잘못을 따질 수가 있느냐는 문제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사랑’에 관한 스토리. 그 스토리의 변형은 무수히 많다. 알콜 중독자이며 천재 의사인 친구는 그 친구 때문에 자기 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의 능력과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식상한 스토리와 지루한 전개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물론 내용과 형식을 꼼꼼이 뜯어 먹으며 갓 구운 식빵처럼 방금 나온 소설을 대하는 일은 나른한 행복에 속한다.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는 이상 문학상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불손하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보류된다. 대부분의 독자는 연초에 나오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1년간 한국문단의 소설에 대한 점검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내 손으로 산 책이 18권, 눈에 띠는 대로 주어다 꽂아 놓은 것이 3권이니 습관내지 중독처럼 매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사 읽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소설가 한 명 씩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심사위원도 바뀌어 가고, 기수상작가 우수작이나 특별상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독자들의 시선은 이 한 권에 책에 보내는 기대와 믿음이 크다. 그러니 매년 즐거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문단 권력의 의한 나눠먹기 수상에 대한 의혹은 단순한 문학권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이인화의 수상으로 촉발되었던 시비와 문제제기는 조용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설가들의 이력과 면면들, 수상선정 이유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감동없이 진부하다. 여기서 진부하다는 것은 스토리다. 정제된 문체와 다듬어진 문장들, 탄탄한 구성과 주제를 이끌어내는 솜씨는 갈채를 보낼만하다. 그러나 내게 전해진 그녀의 소설은 신선하지도 않았으며 섬세한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완벽한 천재에 가까운 인간에 대한 열등감은 주인공의 욕망으로 대체된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곧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한다. 가 본적 없는 북유럽의 환한 밤과 뭉크의 그림은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고 삶의 진정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짜 절규’는 없다. 다만 뭉크의 절규가 떠난 자리에 오롯한 슬픔으로 남은 빈 자리에 액자가 걸렸던 자국만이 선명할 뿐이다. 무엇을 말하든, 방법만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면 여전히 소설은 그 마음의 물결만 남는다. 천재의사의 치기에 가까운 몸부림은 개연성이 없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품게 되는 욕망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를 드러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동일시 된 감정과 오히려 엉성해져버린 필연성이 작가의 의도라면 할 말은 없다.

  대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들의 결선 투표를 벌였다는 전경린의 <야상록>에 한 표를 더해주고 싶다. 문예지에서 읽었던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밖에 김경욱과 구광본의 소설은 신선함을, 함정임의 ‘자두’는 지루함을, 윤성희의 ‘무릎’은 주목을 끈다. 소설적 성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균등 배열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타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갔다.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생이 아깝지 않다면 내년을 기다리면 그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였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스스로 욕망하지 않고, 타인을 욕망한다고. 또한 모든 욕망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말했다.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나는 충만할 수 있다고. - 채호석, 작품론 - ''환의 절규''중에서

  채호석의 작품론 서두 부분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여기서 ‘타인’은 ‘타인들’로 복수의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타인’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욕망’에 관한한 가장 잔인한 거울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 거울을 보라. 그리고 내 욕망을 확인하라. 그것이 ‘타인의 욕망’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욕망’인가.

  환한 밤을 여러 번 나누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뭉크의 절규가 한 작품이 아니?수없이 여러 개의 ‘절규’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순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수많은 ‘절규’들을 떠올리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동그란 눈과 입, 귀를 틀어막은 손보다 배경으로 꿈틀대?그 암울함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뭉크의 첫 ‘절규’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했다.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라 각인된 그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라의 죽음’을 보여 느꼈던 그 선명한 피의 냄새는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 언어예술의 정점에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극대화시킨다. 보다 좋은 풍부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 수 있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써보겠다고 덤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06020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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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들’과 ‘당신들’은 나의 포함 여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금을 그어 놓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당신들’이라는 말에는 소외된 ‘나’와 ‘우리들’이 존재한다.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말하는 방식인 ‘당신들’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소설과 다른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냉정하고 분별있는 시선으로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이거나 공정한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도 지니고 있다.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는 외국인은 아니지만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전통과 문화적 관점에서 혹은 유전적 관점에서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내게는 그가 또 다른 유형의 주변인이자 경계인으로 비친다. 그래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소속된 집단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일정부분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할 때, 박노자의 견해에 대해 많은 오류와 문제점도 지적당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논의에 대해 기본적인 시각차를 인정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2006년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에 대한 문제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우리의 모습을 조망해 보는 모습은 항상 필요하다. 쓴소리와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박노자가 우리 사회를 보는 관점은 긍정 속에 부정이다.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주)대한민국은 이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2001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응은 다양했다. 5년 후 속편 격인 ‘당신들의 대한민국 02’가 나왔다. 참여정부가 들어섰고 박노자는 이제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을 떠났다고 해서 그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던 표현과 비판을 넘어서 때로는 과격하고 감정적인 발언도 불사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은 알면서 고쳐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늘 궁금하다. 그의 말과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영향 때문이 아니라 벽안의 귀화 한국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권위주의와 숭미주의, 박제가 된 학문의 자유와 합리화된 폭력들, 민족주의와 북한의 문제 그리고 보수를 넘어 진보를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미온적 ‘개혁’의 흉내가 아니라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행간에 묻어 있는 그의 생각들은 ‘이상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가 꿈을 꾸면 이루어 낼 수 있는 대단히 현실적인 이상들이다. 실현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미래의 모습, 현실속의 가능태로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향의 문제를 점검하는 데 일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겨레에 여전히 칼럼을 쓰며 변함없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는 그의 쓴소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목소리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적당한 거리에서 비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이, 박노자의 눈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노동자, 농민이라는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습과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소수의 모습까지 두루 점검하고 손길을 내밀어 더불어 함께 걸어가야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다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분열되고 이기적인 모습들,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우리의 모습들을 점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차별과 폭력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위정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대타협의 서구 유럽의 모델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벗어던져야 할 편견과 익숙해져버린 이기심이다. 쉬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욕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길이 아니라고 우기지 말고 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박노자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아니다. 대학 교수의 직함을 가진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류 資鍍퓸?버린 신분과 다르게 그는 영원히 비판적 시선으로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이야기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근본 체제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내고 반성할 때 ‘당신들’이 아닌 ‘우리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큰 틀과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 갑론을박하는 현 정치권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미래는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050208-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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