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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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해도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너그러움과 태도는 고아리의 아버지 개인적 성향이다. 그것을 사회주의자가 인간을 향해 갖고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수는 없다. 바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의 면면이 드러나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야했던 분들의 신산한 삶이 어디 소설 한 두권 안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낸 할머니 덕에 내가 존재한다. 희박한 비율의 생존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아버지 덕에 그분의 삶을 전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도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이 소설을 쓴 건 아닐 게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갈등도 좌우대립도 올곧은 신념도 아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빨갱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짖어도 될만큼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면에 숨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원한과 감정 너머 현실을 살필 합리성이 결여된 비난들이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이념에 매몰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고 그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겨우 장만한 집 한 채 세금을 덜 내고 싶어 투표했다는 후배나 집값이 너무 올라 화가나서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선된 대통령의 능력과 됨됨이에 국한 문제가 아니다. 또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결정된 사람들의 단단한 논리를 깰 능력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길에 이르는 개인적 경험, 합리화 과정도 제각각이다. 소설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와 무관하게 사회주의자 ‘뽈갱이’였던 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 그 머나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긴 조사弔詞처럼 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민족답게 해학으로 가득한 표현 속에 정지아의 슬픔은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마음이 같지 않듯, 모든 부모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같지 않다. 본능은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든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따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고아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 관계의 특별함이 이 소설의 독특한 아우라를 빚는다.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인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외쳤던 볼테르의 말에 대한민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식의 가장 큰 죄는 침묵이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뽈갱이’에 대한 적개심과 ‘전라디언’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외눈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구별짓기는 계층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무지의 오류이거나 극단적 편견의 전형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차별받기 마련이다. 아니 차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차별하기로 실천하는 비겁함은 아닐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라던 전우익 선생의 말이 소설 속 아버지의 ‘항꾼에’에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과 생각과 감정이 일치할 때만 성립되는 교집합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은 성공한 자들의 후일담보다 길고 지루하다. 각자의 ‘선’이 달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기준과 영역도 다르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대개 세상이 움직여지고 인재임이 분명한 사고에도 책임은 아랫 것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을 뿐 미래의 권려과 부는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왜 그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가. 놀랍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만 출세에 성공하고 미련스럽게 민중에 대한 믿음과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고아리의 아버지처럼 사회주의를 꿈꾸는 건 아닐까. 아니 그리 거창한 이념과 혁명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하는 건 아닐까. 슬프고 재밌는, 눈물과 함께 읽은 나의 아버지와 고아리의 아버지 이야기가 혼재했던 이야기를 오래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학적 감동은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과 닿는 접점과 인물에 투사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읽지도 못할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눈물 범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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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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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실린 단편 「완전한 은둔자」를 읽었을 때 충격이 떠올랐습니다. SF는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서 잘 읽지 않습니다. 쥘 베른의 소설 같은 고전은 좀 읽었으나 김초엽의 소설도 읽다 덮을만큼 어느 구석에 닿지 못하나 봅니다. 독서모임의 장점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책과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망설이다 끝까지 읽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편인 「적절한 사랑」(1991)과 「100광년 일기」(1992)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뇌를 자궁에 품을 수 있다는 상상은 충격적입니다. 아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모티브를 얻었을 듯 싶습니다. 어쨌든 상상력엔 한계가 없으니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목도하는 현대인에게 불가능한 미래는 거의 없을 겁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충돌하는 지점이 아마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요. 바닷속을 여행하고 하늘을 나는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장기를 갈아 끼우는 건 일도 아닌 세상이니, 뇌를 리부팅하거나 다른 몸에 이식해서 영생을 꿈꾸는 일도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두려운가요, 아니면 기대되나요?

순전히 ‘나’의 판단과 선택이라고 믿는 모든 일들이, 미래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착각은 아닐까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분야가 아니라 뇌과학과 심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온지 오랩니다. 그렉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1995)에는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인터넷이 일상에 활용되어 네트워크 세상을 사는 우리에겐 조금 진부한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번역자 김상훈의 해설대로 하드 SF를 읽는 일은 피학적 독서를 즐기는 분이 아니라면 생소하고 고통스런 경험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최신 과학, 의학 이론이 주인공, 즉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천착하는 과정의 도구이자 장치라고 생각하기엔 분량과 스타일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주제에 매몰된 1인칭 주인공의 사변적 고백이 ‘지루함’을 만들었습니다. 철학적 고민은 독자의 몫이어야 하는데, 주인공이 스스로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면 곤란합니다. 주인공은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에 치중해야 하는 게 소설의 고전전 문법이 아닐까요. SF 소설 매니아들이 들으면 쌍욕을 먹을 만한 볼멘 소리일까요. 읽는 재미가 덜해지는 이유는 자명하게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스토리 전개와 지나치게 고뇌하는 미래 주인공들의 현실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의 목적과 의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대개 사회과학, 과학철학, 윤리학의 문제라면 이미 그 분야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을텐데 굳이 소설이라는 도구가 필요한가 싶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와 달리 SF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다른 관점과 낯선 시선 때문이니 경청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테드 창과 그렉 이건의 차이, 김초엽을 비롯하 최근 경향까지 알게됐지만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설득을 당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드 SF(자연과학 기반) : 휴머니스트 SF(심리학이나 인류학 등 인문과학)

󰀻

*1960년대 뉴웨이브 : 문학적, 인문학적으로 세련된 SF 지향

*1970년대 하드 SF : 다수의 고전 걸작 양산

*1980년대 사이버 펑크 : 스타일을 중시하면서도 정보과학과 생명과학을 위시한 첨단 과학의 내재화 강조

*1990년대 포스트 사이버 펑크 : 바이오테크놀로지BT,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IT, 나노 테크놀로지NT 등

신세대 하드 SF(테드 창, 그렉 이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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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기술에 대한 전문지식 : 실존하는 현실의 하부구조를 밝혀내는 성배 탐색에 준하는 행위

김상훈의 해설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렉 이건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SF계의 뱅크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답니다. 텍스트는 미술, 음악 분야의 감각적 인상과 다릅니다. 읽고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에서 인간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주제로 모아지지 않을까요. SF 소설도 그렇다고 하는데 개인의 정체성, 자유의지가 정치와 경제,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프로파간다를 견딜 수 있는 개인이 있을까 싶은 우려는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사색하고 공부하라는 루쉰의 호통이 죽비처럼 현대인의 어깨를 내리칩니다. 소설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현실과 인간의 삶으로 연결된다면 SF가 아니라 휴머니즘이 되겠지요.

「내가 행복한 이유」(1997)와 「내가 되는 법 배우기」(1990)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오갔습니다. 결국 모든 독서는 ‘나’에게 닿는 머나먼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블랙 미러」시리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포스트 사이버 평크 SF에 해당하는 건가 싶습니다. 다가올 미래, 아니 이미 당도해 있는 미래인 오늘, 겨우 1.4킬로그램 밖에 안되는 뇌의 사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존 레이티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니 나는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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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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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았더라도 ‘면도날’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날카로움보다 예리한 간극을 넘어서는 삶의 구도 행위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서머싯 몸이 래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의 진리 혹은 삶의 불가해함을 이해하더라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엘리엇과 이사벨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은 어떻게 수용 혹은 거부해야 하는가.

“내 생각엔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 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데.”(349쪽) 철저하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엘리엇 템플펀의 삶을 구술하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래리 대럴이다. 실명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생경하지만 사실성과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도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게 호소하는 작가의 태도에 읽는 자세를 조금 고쳤을지도 모르겠다. 1944년 출간된 이 소설은 내게 비트 세대의 바이블처럼 읽히던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의 원조 혹은 유럽 버전으로 읽혔다. 두 작가 모두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를 읽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시대든 청춘의 방황과 삶의 길 찾기를 다룬 이야기는 쉼 없이 양산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어떤 시대에도 답을 찾은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1930년대의 프랑스 파리와 미국의 시카고 그리고 영국의 런던 등 유럽의 중심지역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대표하는 엘리엇 템플턴과의 연결고리가 그의 조카 이사벨, 이사벨의 연인 래리 등 주변 인물들과 관계로 넓혀진다. 20세기 초반 유럽이지만 신분 질서는 여전했고, 사회 계층 의식은 뚜렷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당대 사회를 철저하게 반영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는다.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 작가의 삶을 산 서머싯 몸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내공을 쌓으며 ‘인간의 굴레’에 대해 고민한다. 달의 세계를 사는 래리와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이사벨은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발 딛고 선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달라진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의미와 한계가 분명하다. 래리는 몸에게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39쪽)라고 말한다. 이사벨과 친해진 몸은 그레이와 결혼한 후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343쪽)라는 말로 ‘현자 타임’을 갖게 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소피 맥도널드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며 “거짓말은 그만하지, 이사벨.”(494쪽)이라고 지적한다. 세 번의 ‘거짓말’은 모두 이사벨을 향한다. 이상주의자 래리와 현실주의자 이사벨의 접점은 없다. 사랑도 삶의 일부지만 자기 삶에 사랑이 분명하게 놓일 자리는 현실이다.

면도날은 두 남녀 주인공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획정하며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분명하게 나눈다. 또한 소설의 안과 밖을 이어보려는 서머싯 몸의 시도를 잘라버린다. 여전히 신과 인간의 문제, 즉 종교와 충돌하는 현실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었는지에 따라 모든 책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874년생인 작가가 1944년 일흔에 출간한 소설은 자전적 경험과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인생을 살고 나면 굳이 지어내지 않아도 조금의 각색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한 권의 소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80쪽)라는 래리의 고백이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514쪽)라는 몸의 서술로 마무리 되는 소설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개별 독자의 몫이지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필경비 바틀비의 목소리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래리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돈이 되는 일, 세속적 욕망을 달성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이 있으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래리는 결국 빈털터리로 뉴욕으로 향한다. 남은 삶이 어떠하든, 이 소설은 성자가 된 래리의 후일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개 누구나 그러하듯,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분노하거나 위로를 받는다. 그 깊은 한숨의 의미는 각자 자기 삶의 목적지 혹은 방법과 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원을 향한 삶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면도날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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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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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자세히 보라. 인생은 도처에 형벌을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 285쪽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교차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면 주변의 사물이 보이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정기수 번역본(민음사) 『레 미제라블』 5권은 2,556쪽이다.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빅토르 위고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을 모두 담았다. 단순히 장편소설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긴 글이다.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 장 발장 등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자베르, 테나르디에 등 조연과 엑스트라까지 수백 명이 출연하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린 당대의 역사이며 철학이고 사회사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넘어 신을 향한 질문과 고민, 인간이 사는 사회에 관한 성찰,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대한 고뇌가 담긴 이 긴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독자마다 다를 터. 터널 안에 스치는 불빛과 명멸하는 그림자를 뒤로 하며 달리는 자동차는 저 멀리 희미한 빛을 향해 질주한다. 동전만큼 아주 작은 크기의 희미한 빛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제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으로 나뉜다. 유일하게 사람을 앞세우지 않은 4부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 그리고 1832년 6월 혁명을 설명한다. 서정시와 서사시가 교차하는 건 비단 4부뿐만이 아니다. 1부에서 미리엘 주교를 등장시켜 종교적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성찰을 요구하며 출발한 작가는 2부에서는 워털루 답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묻고 3부에서는 질노르망을 통해 왕당파의 입장을 전한다. 4부와 5부에서는 바리케이드로 상징되는 혁명의 역사와 시가전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소설 너머 작가의 현실 인식을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현대 소설의 문법에 전혀 맞지 않는 4부 7장 ‘곁말’의 등장처럼 빅토르 위고는 이 거대한 텍스트를 마치 자기 삶의 비망록처럼 다루고 있는 느낌이다. 1802년생인 작가가 간접 경험한 1815년 워털루, 혁명에 한복판에 서 있었던 1832년 6월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주인공이자 신의 현신, 고뇌하는 작가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장 발장은 1815년에 출소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돼 장 발장이 죽음에 이르는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시작은 1789년 7월 14일이며 글을 쓰고 있는 1861년 현재 시점으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당대의 시론時論 혹은 시평時評에 해당하는 내용이 서사의 흐름 사이사이에 등장하며 독자를 괴롭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신은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지금은 어떤 시대며 우리에게 혁명은 무엇이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이 소설에도 적절하게 등장하며 기막힌 우연과 비현실적 문제해결로 주인공들은 숱한 위기를 넘긴다. 기본적인 서사와 스토리는 진부하나, 성경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많이 읽힐 만큼 주목받았던 이유는 자명하다. 빅토르 위고의 문체와 주제 의식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현실적 고뇌가 주인공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며 세밀화처럼 기막힌 묘사는 당대 소설로는 넘사벽이었을 듯싶다. 2023년에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문장의 힘이 남다르다. 결국 좋은 글은 작가의 고민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진정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부와 5부의 중심인 1832년 6월은 작가의 나이 서른이었다. 직접 목격하고 고민했을 장면들을 통해 프랑스의 기나긴 혁명사, 아니 유럽과 인류 전체에 미친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그래서 이 소설은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되는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코제트와 에포닌의 사랑은 왜 다른가. 마리우스가 왕당파 할아버지와 달리 워털루에 참전한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마리우스가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은가.

시가전은 바리케이드 이쪽과 저쪽을 모두 담진 못했다. 객관적 역사 서술과 달리 소설가는 인물을 통해 혁명의 당위성과 의미를 담아낼 뿐이다. 그 장엄하고 숭고한 장면들을 통해 ‘진보는 국민들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면 그뿐이다. 해석과 평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전멸한 시민군을 통해 혁명, 즉 폭동과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협소한 해석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적 ‘진보’의 힘을 믿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과 관념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 혁명과 진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속죄 의식이다.

악인으로 등장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자베르와 테나르디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자베르가 자신의 신념과 고뇌를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비해 테나르디에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악역을 감당한다. 에포닌과 가브로슈가 묘한 인연의 연결고리로 소설 곳곳에 등장하지만 결국 코제트와 마리우스 그리고 장 발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ABC의 벗들’이나 파리의 부랑자들이 다수 등장하며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다양한 인간의 욕망과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은 조금 지루하고 사색적인 문장과 숨 가쁘고 긴박한 호흡의 적절한 배치로 빛난다. 다만 소설의 마무리는 못내 아쉽다. 결국 장 발장의 긴 행로가 상속을 위한 것이었을까.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전한 60만 프랑을 어떻게 벌었는지 설명하며 그것이 정당한 돈임을 역설하는 장면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500프랑을 남겼다는 설명은 신의 아바타 역할을 해온 장 발장의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것이 설령 당대 부르주아의 일반적 상식과 서민들의 소망이었다 할지라도 소설은 세습과 상속, 불로 소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의 삶을 묘사하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5부 장 발장은 시가전과 마리우스를 살려내는 장 발장의 초인적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파리의 하수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후 해피엔딩을 향한 스토리의 수습과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은 반전 없이 진행된다. 장 발장으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프랑스가 궁금해서 지금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가 대개 그러하듯이 변치 않는 인간의 보편성, 당대 사회와 역사의 단면이 보여주는 특수성 그리고 그 숱한 알레고리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놀라운 기시감 때문이 아닐까.

빅토르 위고는 이 소설을 1845년부터 1862년까지 17년간 집필했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왕정복고, 1832년 6월 혁명은 물론 수도원 생활, 파리의 부랑자들, 시가지의 모습과 하수도 등 당대의 역사이며 풍속화인 이 소설은 그 어떤 작품과 비교 불가능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을 작가는 이렇게 겸손하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시적 서정성과 거대 담론을 오가며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빅토르 위고는 미움받는 자를 사랑하고 타락한 자를 구원하는 종교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긴 시간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세상에는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인간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며 혁명을 통해 한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곳곳에 배치되어 이 길고 긴 텍스트가 남긴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죄와 벌』이나 톨스토이가『부활』보다 먼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역사적 진보와 혁명으로 다룬 이 소설에 더 애정이 가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레 미제라블』은 내게 ‘사랑과 혁명’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주었다. “인류의 일반적인 생활을 ‘진보’라 부른다. 인류의 집단적인 걸음걸이를 ‘진보’라고 부른다. 진보는 전진한다. 그것은 천국적이고 신적인 것을 향해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대여행을 한다.”라는 말에 공감했고, “혁명은 사고에서가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 하나의 혁명은 인위에서 실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에 숙연해졌다. 나로부터의 혁명, 자기 안에 사랑이 먼저다.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랑한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아무것도 원하지 마라. 인생의 어두운 주름살 속에서 찾아낼 진주는 그밖에 없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완성이다. - 352쪽

미완의 인생이면 어떤가. 그 또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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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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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 2권, 22쪽

보나파르트의 꿈이 아니라 프랑스, 아니 유럽의 미래가 뒤바뀐 역사적 전투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여전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기록된 순간이 갖는 의미는 실제보다 해석의 문제다. 그것은 국가 혹은 인류가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돌이켜 보게 되는 일, 선택의 순간들 사이에 ‘실수’는 없다. 축적된 경험과 상황 판단, 정보 분석...휴리스틱이 작동한 최선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뿐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동쪽에 위치한 워털루에 선 빅토르 위고를 상상해 본다. 1861년의 빅토르 위고의 눈에 비친 전투는 시간을 거슬러 46년 전의 현장을 사진처럼 선명하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순간들, 아쉬움과 감탄이 혼재한 상황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2권 ‘워털루’는 왜 빅토르 위고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보나파르트의 자신감과 판을 읽는 능력, 웰링턴의 위기와 불안감,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과 용기, 전투의 치열함과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한 드라마를 본 듯한 환영에 사로잡힌다.

역사적 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대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 개입으로 이뤄진다. 빅토르 위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현장 답사를 통해 지형, 지물을 세세히 파악한 빅토르 위고는 워털루 전투 관련 보고서와 통계를 인용하며 입체적 시선으로 1815년 6월 18일을 살핀다. 전체 5부로 구성된 ‘레 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쳐 18년간 감옥살이를 한 억울한 사내 장 발장의 인생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없다. 2권의 주인공은 코제트다. 워털루 전쟁에서 살아남은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와 테나르디에가 3권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니, 소설 전체 구성에서 소환당한 과거 혹은 역사는 거대한 복선이거나 생의 부조리와 불가해한 삶의 필연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 의식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추동하는 힘의 근원에 관한 고찰이다. 신에게 부여받은 삶의 원리, 즉 종교적 윤리와 신이 부여한 운명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묻는다. 빅토르 위고가 스스로 밝히듯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코제트를 찾아나선 마들렌 영감은 고르보 누옥을 거쳐 수도원에 잠입한다. ‘감옥과 죄수’는 ‘수녀원과 수녀’와 같으면서 다르다. 인간은 원죄와 속죄로 신에게 현실을 저당잡힌다. 중세적 세계관, 즉 종교적 절대주의와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날카롭다. 신랄한 비판과 감정적 증오 대신 냉정한 평가와 이성적 분노를 담아낸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 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 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제 목적에 도달한다. - 85쪽

코제트를 착취하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고르보 누옥에 종드레트라는 이름으로 스며든다. 워털루 전투에서 테나르디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믿는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가 3권의 주인공이다. 철저한 왕당파 외조부 질노르망의 손에 자란 마리우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과정과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간의 사슬에 묶여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결국 현실의 구조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객관적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듯하다. 부르주아의 논리와 상퀼로트의 이익이 충돌하듯 혁명은 계속되고 ‘레 미제라블’이 혼거하는 현실에서 개별 독자는 스스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궁금해졌다.

재탈옥 8년 만인 1831년,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난 르블랑과 라누아르는 숙명적으로 마리우스와 연결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이 기막힌 우연과 피할 수 없는 우연은 소설 내내 지속된다. ‘ABC의 벗’들과 ‘파트롱 미네트’로 불리는 인간 군상이 대거 등장하는 3권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종드레트의 아들 가브로슈부터 질노르망, 앙졸라, 콩브페르, 쿠르페락 등 인물에 집중한 작가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하고 인물 묘사를 통해 당대 현실을 다양하게 보려주려 노력한다. 소설적 장치로서 장 발장과 코제트가 등장하지만 인물과 인물들 사이의 질긴 인연과 자베르로 상징되는 악인과의 대결구도는 서사 구조의 한 축일 뿐이다.

또다시 위기를 넘긴 장 발장과 코제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남은 4, 5권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 그리고 현실과 운명의 문제를 풀어낼까. 몇몇 주인공 혹은 몇몇 사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다.

나는 승리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다운 영광은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좀 논증하도록 애써 보아라!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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