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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았더라도 ‘면도날’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날카로움보다 예리한 간극을 넘어서는 삶의 구도 행위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서머싯 몸이 래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의 진리 혹은 삶의 불가해함을 이해하더라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엘리엇과 이사벨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은 어떻게 수용 혹은 거부해야 하는가.
“내 생각엔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 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데.”(349쪽) 철저하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엘리엇 템플펀의 삶을 구술하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래리 대럴이다. 실명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생경하지만 사실성과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도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게 호소하는 작가의 태도에 읽는 자세를 조금 고쳤을지도 모르겠다. 1944년 출간된 이 소설은 내게 비트 세대의 바이블처럼 읽히던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의 원조 혹은 유럽 버전으로 읽혔다. 두 작가 모두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를 읽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시대든 청춘의 방황과 삶의 길 찾기를 다룬 이야기는 쉼 없이 양산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어떤 시대에도 답을 찾은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1930년대의 프랑스 파리와 미국의 시카고 그리고 영국의 런던 등 유럽의 중심지역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대표하는 엘리엇 템플턴과의 연결고리가 그의 조카 이사벨, 이사벨의 연인 래리 등 주변 인물들과 관계로 넓혀진다. 20세기 초반 유럽이지만 신분 질서는 여전했고, 사회 계층 의식은 뚜렷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당대 사회를 철저하게 반영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는다.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 작가의 삶을 산 서머싯 몸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내공을 쌓으며 ‘인간의 굴레’에 대해 고민한다. 달의 세계를 사는 래리와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이사벨은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발 딛고 선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달라진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의미와 한계가 분명하다. 래리는 몸에게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39쪽)라고 말한다. 이사벨과 친해진 몸은 그레이와 결혼한 후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343쪽)라는 말로 ‘현자 타임’을 갖게 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소피 맥도널드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며 “거짓말은 그만하지, 이사벨.”(494쪽)이라고 지적한다. 세 번의 ‘거짓말’은 모두 이사벨을 향한다. 이상주의자 래리와 현실주의자 이사벨의 접점은 없다. 사랑도 삶의 일부지만 자기 삶에 사랑이 분명하게 놓일 자리는 현실이다.
면도날은 두 남녀 주인공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획정하며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분명하게 나눈다. 또한 소설의 안과 밖을 이어보려는 서머싯 몸의 시도를 잘라버린다. 여전히 신과 인간의 문제, 즉 종교와 충돌하는 현실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었는지에 따라 모든 책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874년생인 작가가 1944년 일흔에 출간한 소설은 자전적 경험과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인생을 살고 나면 굳이 지어내지 않아도 조금의 각색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한 권의 소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80쪽)라는 래리의 고백이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514쪽)라는 몸의 서술로 마무리 되는 소설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개별 독자의 몫이지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필경비 바틀비의 목소리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래리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돈이 되는 일, 세속적 욕망을 달성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이 있으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래리는 결국 빈털터리로 뉴욕으로 향한다. 남은 삶이 어떠하든, 이 소설은 성자가 된 래리의 후일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개 누구나 그러하듯,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분노하거나 위로를 받는다. 그 깊은 한숨의 의미는 각자 자기 삶의 목적지 혹은 방법과 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원을 향한 삶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면도날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