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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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해도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너그러움과 태도는 고아리의 아버지 개인적 성향이다. 그것을 사회주의자가 인간을 향해 갖고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수는 없다. 바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의 면면이 드러나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야했던 분들의 신산한 삶이 어디 소설 한 두권 안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낸 할머니 덕에 내가 존재한다. 희박한 비율의 생존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아버지 덕에 그분의 삶을 전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도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이 소설을 쓴 건 아닐 게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갈등도 좌우대립도 올곧은 신념도 아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빨갱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짖어도 될만큼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면에 숨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원한과 감정 너머 현실을 살필 합리성이 결여된 비난들이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이념에 매몰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고 그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겨우 장만한 집 한 채 세금을 덜 내고 싶어 투표했다는 후배나 집값이 너무 올라 화가나서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선된 대통령의 능력과 됨됨이에 국한 문제가 아니다. 또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결정된 사람들의 단단한 논리를 깰 능력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길에 이르는 개인적 경험, 합리화 과정도 제각각이다. 소설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와 무관하게 사회주의자 ‘뽈갱이’였던 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 그 머나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긴 조사弔詞처럼 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민족답게 해학으로 가득한 표현 속에 정지아의 슬픔은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마음이 같지 않듯, 모든 부모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같지 않다. 본능은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든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따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고아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 관계의 특별함이 이 소설의 독특한 아우라를 빚는다.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인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외쳤던 볼테르의 말에 대한민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식의 가장 큰 죄는 침묵이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뽈갱이’에 대한 적개심과 ‘전라디언’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외눈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구별짓기는 계층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무지의 오류이거나 극단적 편견의 전형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차별받기 마련이다. 아니 차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차별하기로 실천하는 비겁함은 아닐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라던 전우익 선생의 말이 소설 속 아버지의 ‘항꾼에’에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과 생각과 감정이 일치할 때만 성립되는 교집합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은 성공한 자들의 후일담보다 길고 지루하다. 각자의 ‘선’이 달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기준과 영역도 다르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대개 세상이 움직여지고 인재임이 분명한 사고에도 책임은 아랫 것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을 뿐 미래의 권려과 부는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왜 그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가. 놀랍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만 출세에 성공하고 미련스럽게 민중에 대한 믿음과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고아리의 아버지처럼 사회주의를 꿈꾸는 건 아닐까. 아니 그리 거창한 이념과 혁명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하는 건 아닐까. 슬프고 재밌는, 눈물과 함께 읽은 나의 아버지와 고아리의 아버지 이야기가 혼재했던 이야기를 오래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학적 감동은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과 닿는 접점과 인물에 투사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읽지도 못할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눈물 범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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