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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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 2권, 22쪽

보나파르트의 꿈이 아니라 프랑스, 아니 유럽의 미래가 뒤바뀐 역사적 전투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여전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기록된 순간이 갖는 의미는 실제보다 해석의 문제다. 그것은 국가 혹은 인류가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돌이켜 보게 되는 일, 선택의 순간들 사이에 ‘실수’는 없다. 축적된 경험과 상황 판단, 정보 분석...휴리스틱이 작동한 최선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뿐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동쪽에 위치한 워털루에 선 빅토르 위고를 상상해 본다. 1861년의 빅토르 위고의 눈에 비친 전투는 시간을 거슬러 46년 전의 현장을 사진처럼 선명하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순간들, 아쉬움과 감탄이 혼재한 상황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2권 ‘워털루’는 왜 빅토르 위고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보나파르트의 자신감과 판을 읽는 능력, 웰링턴의 위기와 불안감,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과 용기, 전투의 치열함과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한 드라마를 본 듯한 환영에 사로잡힌다.

역사적 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대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 개입으로 이뤄진다. 빅토르 위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현장 답사를 통해 지형, 지물을 세세히 파악한 빅토르 위고는 워털루 전투 관련 보고서와 통계를 인용하며 입체적 시선으로 1815년 6월 18일을 살핀다. 전체 5부로 구성된 ‘레 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쳐 18년간 감옥살이를 한 억울한 사내 장 발장의 인생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없다. 2권의 주인공은 코제트다. 워털루 전쟁에서 살아남은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와 테나르디에가 3권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니, 소설 전체 구성에서 소환당한 과거 혹은 역사는 거대한 복선이거나 생의 부조리와 불가해한 삶의 필연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 의식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추동하는 힘의 근원에 관한 고찰이다. 신에게 부여받은 삶의 원리, 즉 종교적 윤리와 신이 부여한 운명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묻는다. 빅토르 위고가 스스로 밝히듯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코제트를 찾아나선 마들렌 영감은 고르보 누옥을 거쳐 수도원에 잠입한다. ‘감옥과 죄수’는 ‘수녀원과 수녀’와 같으면서 다르다. 인간은 원죄와 속죄로 신에게 현실을 저당잡힌다. 중세적 세계관, 즉 종교적 절대주의와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날카롭다. 신랄한 비판과 감정적 증오 대신 냉정한 평가와 이성적 분노를 담아낸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 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 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제 목적에 도달한다. - 85쪽

코제트를 착취하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고르보 누옥에 종드레트라는 이름으로 스며든다. 워털루 전투에서 테나르디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믿는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가 3권의 주인공이다. 철저한 왕당파 외조부 질노르망의 손에 자란 마리우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과정과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간의 사슬에 묶여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결국 현실의 구조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객관적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듯하다. 부르주아의 논리와 상퀼로트의 이익이 충돌하듯 혁명은 계속되고 ‘레 미제라블’이 혼거하는 현실에서 개별 독자는 스스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궁금해졌다.

재탈옥 8년 만인 1831년,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난 르블랑과 라누아르는 숙명적으로 마리우스와 연결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이 기막힌 우연과 피할 수 없는 우연은 소설 내내 지속된다. ‘ABC의 벗’들과 ‘파트롱 미네트’로 불리는 인간 군상이 대거 등장하는 3권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종드레트의 아들 가브로슈부터 질노르망, 앙졸라, 콩브페르, 쿠르페락 등 인물에 집중한 작가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하고 인물 묘사를 통해 당대 현실을 다양하게 보려주려 노력한다. 소설적 장치로서 장 발장과 코제트가 등장하지만 인물과 인물들 사이의 질긴 인연과 자베르로 상징되는 악인과의 대결구도는 서사 구조의 한 축일 뿐이다.

또다시 위기를 넘긴 장 발장과 코제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남은 4, 5권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 그리고 현실과 운명의 문제를 풀어낼까. 몇몇 주인공 혹은 몇몇 사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다.

나는 승리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다운 영광은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좀 논증하도록 애써 보아라!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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