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백화점 5층 식당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오랜만의 외출이니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곳에서만 파는 냉면을 드시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30분쯤 기다리니 자리가 났다. 이미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얼른 먹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회냉면은 새로울 게 없었다. 홍어 대신 가자미를 고명으로 올려 훨씬 씹는 맛이 더 고소하다는 선전문구가 벽에 붙어 있었지만 글쎄. 어머니는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워 보이셨다. 나를 바라보며 맛있지 않니?”를 연발했다. 나는 건성으로 , 하며 고개를 숙인 채 먹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에어컨 고장으로 대신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은 시원하기는커녕 되레 끈끈했다.

저기요.”

처음에는 몰랐다.

이봐요.”

머리를 들어보니 오른손에 큰 가위를 든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서있었다.

, 됐습니다. 안 자르셔도 돼요.”

여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키는 16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고 약간 마른 타입이었다. 머리카락은 묶은 채 뒤로 넘겼고 앞치마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식당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마 오늘이 삼사일쯤 됐겠지. 인상은 날카로웠다. 코가 뾰족하고 성형한 티가 확 나는 짙게 쌍까풀 진 두 눈은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숨을 서너 번 고르더니 날카롭게 되물었다.

왜 손가락질을 해요?”

?”

나는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줌마는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로 가위를 높이 쳐들었다.

계속 나를 보면서 손가락질을 했잖아요. 기분 나쁘게.”

정확한 사태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가만있다가는 완전히 뒤집어 쓸 판이라 언성을 높여 되받아쳤다.

뭐라구요? 왜 생사람을 잡아요.”

여인네는 주눅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 듯 얼씨구나 하며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어디서 시치미를 떼? 계속 나를 쳐다보며 손을 들었다 놨다 했잖아.”

이미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갑질하는 진상손님으로 몰릴 판이었다. 더위는 어느새 사라지고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났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이 지옥굴에서 건져달라구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나 시선을 피하고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계셨다. 이런 젠장.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꼼짝하지 않고 아이고 이젠 나 몰라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더니. 아들이 곤경에 처했는데도 똑같군 똑같아. 어느새 주인까지 여자 옆에 서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어서 사과하라구, 어서.

숨 막힐 듯 한 정적을 깬 것은 옆자리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던 젊은 여성이었다.

이 분은 손가락질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차분하게 종업원과 주인집 여자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뭔가 착각하셨나 보네요.”

그 순간 희한하게도 아주머니의 기세는 팍 꺾였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식당 주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에게 거 봐요, 사람을 뭐로 보고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의문이 번개처럼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르며 분노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가락질을 했는지 안했는지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텐데 왜 나를 변호해주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여인의 눈은 크고도 맑았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속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성은 그런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빤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디서 봤나? 아니면 나를 아는 사람인가?

결국 나는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한 채 절반이나 남은 냉면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왜 그러냐며 눈치를 주었다. 나는 갖은 인상을 쓰며 다시 쏘아보았다.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어서, 빨리라고 또박또박 끊어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이곳에서 벗어나자구,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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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이자 월요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정규 직장을 그만두고 치러 온 나만의 의식이다. 일이 생겨도 웬만하면 월요일은 피해왔으며 오로지 관악산만 오른다. 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다는 장점 때문만은 아니다. 연주암에서 제공하는 공짜 점식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재미있는 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정상에 올랐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졌겠지.

어제도 그랬다. 한동안 읽기에만 치중하고 글쓰기는 간단한 서평 외에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억지로 쓰라고 하면 쓸 수도 있었겠지만 도저히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열정이 생기지 않아서다. 그럴 땐 팬을 들어서는 안 된다. 노트북을 펼쳐 전원을 켜서도 안 된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 무작정.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보면 문득 뇌 안의 시작 버튼이 깜빡하고 켜지면서 단어가 팝콘 튀기듯 툭툭 튀어나온다. 처음엔 하나씩 천천히 솟아오르다 어느 순간 테트리스처럼 빠르게 마구 떨어진다. 급하게 단어들을 이리저리 맞추어 나가도 보면 서서히 익숙해지다가 어느새 문장이 술술 흘러나온다. 희한하게도 늘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산에 가거나 수영을 할 때 혹은 자전거를 타고.

문제는 책상 앞에 딱 앉아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있던 단어와 문장을 끄집어내어 자판으로 옮기려 하면 그만 턱하고 숨이 막힌다는 거다. 그 빛나던 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제목 하나는 건졌다. 어떤 내용의 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내 모습에 착안하여 이야기를 꾸려갈 것이다. 일종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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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다윈의 어깨에 서서 종의 기원을 목격하다
조너선 와이너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진화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점점 발달해가는 현상을 일컫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기원이후 벼내가는 상황을 지칭한다. 이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변화와 발전은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번때 뜻은 오류다. 흔히 진화라고 하면 뭔가 좋아지는 쪽으로 바뀌는 것으로 쓰는 오류는 더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다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핀치의 부리>는 그 유명한 갈라파고스 제도내 새들의 진화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힌 책이다.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제시했지만 엄밀한 증거를 내세우지는 못했다.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의 기간이라고 해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랜트 부부는  1974년부터 갈파파고스를 찾아 핀치의 부리를 관찰하며 진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끈기도 결국 2009년에 이르러 빛을 발한다. 진화를 거쳐 탄생한 새로운 종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용기있는 생물학자의 모험담만이 아니다. 오랜 기간 자연스레 이루어져왔던 진화의 과정을 파괴하고 있는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 계몽서이기도 하다. 전국을 강타한 살충제 달걀이나 화학성분이 포함한 생리대는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몇천년에 걸쳐도 변화하지 않을 자연의 순리를 순식간에 돈을 위해 무너뜨린 상징이다. 단지 돈때문인지, 아니면 그놈의 편리함때문인지. 분명한 건 지구상에 이토록 어리석은 종족은 인간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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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2
스즈키 마사유키 감독, 기무라 타쿠야 출연 / 알스컴퍼니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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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어로는 영화 한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드라마의 대히트를 넘진 못했지만 그래도 1편은 부산을 보여주는 등 스케일이 커져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2편은 대사관이 배경인데 전혀 이국적이지도 않고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짜집기 한 것 같아 실망스럽다. 가상의 나라를 상대로 정의 운운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오직 기무라 다쿠야의 원맨쇼에 의존할 뿐이었었는데 아무리 영화에서 변한게 없다고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찢어진 청바지에 똥색 겨울외투는 젊었을 때나 개성이었지, 나이 들어 보는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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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 디지팩 + 엽서(3EA)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키키 키린 외 출연 / 인조인간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영화는 잔잔하다는 편견이 있다. 살인자연조차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담아낼까를 고민하느라 전혀 잔인하게 보이지 않는다. 한 때는 이런 풍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장르와 상관없이 비슷비슷해져니 금세 질려버렸다. 마치 일순간 광풍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 홍콩느와르 영화처럼.

 

<태풍이 지나가고>는 옛 영화를 부활시킬만한 영화다. 제목을 보면 태풍이 뭔가 큰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맥거핀이다. 곧 결정적인 단서같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다. 소살가였다가 생활고때문에 사설탐정노릇을 하는 주인공. 그에게는 이혼한 아내와 아들이 있다. 한달에 한번 아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어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가족은 과거를 돌아본다. 이야기를 나누다 미래의 꿈과 희망은 더이상 사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아내와 아들은 떠나고 남자는 사무실로 돌아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바꿔 써도 될만큼 비슷하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픽션에서도 삶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준다고나 할까? 료타 역의 아베 히로시도 좋았고 단발로 변신한 마키 요코도 담담하면서도 똑부러지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압권은 역시 할머니로 분신한 키키 키린이었다. 나는 그녀를 <앙>에서 처음 보았는데 뭔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저 푸근하기만한 노인네가 아니라 관객의 감성을 톡하고 건드리는 마력이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자칫 신파로 빠질뻔한 넋두리를 담백하게 풀어주어 도리어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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