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의 추억

 

 

내가 다니던 대학교주변에는 극장이 딱 하나 있었다. 극장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지하에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당시 대학가는 어수선했다. 1년 내내 제대로 수업을 치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연일 데모, 데모, 데모였다. 물론 나도 그 대열에 낄 때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매일 거리를 쏘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럼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냐구? 당시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 배신자 취급을 당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하여간 그때는 그랬다. 모진 압력에도 그 때 열심히 공부하던 친구들은 요즘 잘 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러운 것은 아니다. 남들 돌 던질 때 공부해서 출세한 사람들의 사고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맞다 극장. 수업도 없고 데모도 뜸한 날이면 우리(여기서 우리는 내 친구들을 말한다)는 극장에서 만났다. 딱히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극장에 가면 늘 친구들이 있었다.

입장료도 쌌다. 천원만 내면 동시상영을 실컷 봤다. 참 갈 데들도 없구만. 서로 혀를 차면서도 낄낄대며 영화를 보곤 했다. 아참, 이건 정말 이해가 안 되겠지만 당시는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사치로 취급받곤 했다. 아 정말 암울한 시대였다.

각설하고 당시 최고의 히트작은 뭐니 뭐니 해도 홍콩영화였다. 영웅본색으로 몰아닥치기 시작한 홍콩영화붐은 첩혈쌍웅”, “도박자”, “동방불패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쏟아냈다.

그러나 역시 누가 뭐래도 홍콩영화하면 영웅본색이 최고였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주윤발이 바바리를 걸치고 성냥개비를 씹으며 돌아다니거나 위조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붙이는 장면, 그리고 장국영을 다그치며 형이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눈물로 호소하다가 총에 맞는 씬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우리는 주윤발 형님을 생각하며 돌을 던졌고,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가 깨진 친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영웅본색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홍콩영화 붐이 사그라지자 학생데모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학교주변에 있던 유일한 극장도 문을 닫았다. 남들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주윤발이 우리나라 학생운동과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믿고 있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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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프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우리 아버지는 영화를 그다지 즐기는 분이 아니셨다. 가족끼리 영화관에 간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면 어머니는 영화광이셨는데, 어릴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을 자주 찾곤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피는 어머니를 물려받은 것 같다.

언젠가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갔을 때 일이다. 가족 모두가 영화관에 가다니 드문 일이었다. 중앙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영화제목은 <챔프>였다. 아버지를 복서로 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

소년은 눈물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영화상영 내내 극장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버지. 당연히 울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아마도 졸음에 못 이겨 나온 하품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극장을 다녀오면 어머니는 한바탕 평론을 하신다. 연기가 어떻고 의상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영화보다 더욱 극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묘사하곤 하신다. 그럴 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다. 한참을 이야기에 몰두하던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갑자기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당신은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예의상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어머니는 이러저러한 장면이 감동적이었다고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다. 그날 저녁 우리는 들었다. 아버지가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는지를.

나는 아이가 울고불고하는 장면에서는 전혀 눈물이 나오지 않더란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거 왜 있잖아. 아이를 부자 집에 맡겨놓고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때우던 남자주인공이 사격경품으로 큰 인형을 상으로 받잖아. 그 인형을 아이에게 주려고 하는데 이미 아이는 근사한 선물을 받았더구만. 차안에 타고 있던 그 남자 슬그머니 차 밖으로 곰인형을 버리던데, 그만 그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더라구. 참 나이 들어 주책이지 뭐야. 영화관에서 눈물을 다 흘리고.”

안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와 내 동생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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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뇌엔 잡음이 너무 많군

 

 

다시 한 번만 봐주세요.”

아니 이상이 없다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아니에요. 귓속이 윙윙거린단 말 이예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신경이 예민한 것뿐이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세요.”

벌써 세 번째다. 아무 이상이 없단다. 다행 아니냐구? 아니다. 귀속이 계속 윙윙거린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자리에 누우면 윙윙거림은 더욱 심해진다. “하는 전파음 같기도 하고, 벌레가 버석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내 주위를 맴돈다. 두 귀를 힘껏 손으로 막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다 문득 문제는 귀가 아니라 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맞아. 뇌의 문제야. 귀는 그저 전달기관일 뿐 인거야.

자네 뇌엔 잡음이 너무 많군.”

? 무슨 말씀이신지?”

쓸데없는 생각이 꽉 차 있어. 뇌가 그 생각들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한번 말해줄까? 생각이 너무 많단 말이야. 생각을 줄여.”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약을 일주일동안만 먹어보게.”

신기한 일이다. 귀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뇌의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다. 물론 잠자리에 누우면 아직도 약간의 잡음이 나기는 하지만.

하지만 무지 졸린다. 약을 먹은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눈이 감긴다. 당연히 무기력증이 따른다. 깜빡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세 시간을 소파에 누워 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도 귀찮아진다. 그저 졸린 채 늘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점점 잃어간다. 잃어간다.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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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에잇, 이따위 회사 더 이상 다니나 봐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결심의 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런데 사표가 한자로 뭐지? 한글로 쓴 사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아니 회사를 그만두는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그냥 한글로 쓰자.

사표. 앗차 사포로 쓸 뻔 했다. 축의금 봉투처럼 아예 사표라는 한자를 써놓은 편지봉투를 팔아도 장사가 되지 않을까? 참 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당에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내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이유를 쓴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자 하오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쓰면 이렇다. 나 관둠. 더 이상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알간?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회사도 이젠 빠이빠이다. 그놈의 부장 얼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그런지 약간은 아쉽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양복 윗도리를 챙겨 입은 나는 그대로 돌진이다.

자네, 이게 뭐야?”

사푭니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나? 이유가 도대체 뭔데?”

일신상의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몸은 자네만 안 좋나? 어디 물려받은 유산이라도 있나보지? 베짱이야.”

이런. 울화가 치민다. 언제나 저런 식이다.’

아닙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받아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그럼 내용이나 보지.”

“... ... ”

자네 지금 장난치나?”

아니 왜 그게 거기?”

나한테 뇌물이라도 주는 건가?”부장의 손에는 도서상품권이 들려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나는 허둥댄다.

앗 여기 있군. 다시 받아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기가 막혀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부장은 봉투를 찢으려고 한다.

찢지 마십시오.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 ... 헉 이건 또 뭐야? 이사할인쿠폰이잖아. 자네 지금 죽을라고 환장했나?”

뭐가 잘못된 거지?’나는 본격적으로 초조해진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여기저기 손에 잡히는 봉투는 무조건 윗저고리에 넣어두는 습관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 잡아 먹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안주머니에 또 다른 봉투가 있다. 겉봉에 사표라는 글자도 보인다. 약간 삐뚤어진 정겨운 내 필체. 휴우 다행이다.

이번에 진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봐주십시오.”나는 자신 있게 봉투를 꺼내어 부장의 책상 앞에 놓는다.

자네 더위 먹었나? 아니면 나랑 놀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긴장했나 봅니다. 그러지 말고 결제해 주십시오.”

한번만 더 이상한 게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꼴깍, 이상하다. 분명히 그 봉투 안에는 일신상의 사유 어쩌구 저쩌구가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또 요술을 부릴 것 같다. 손에 땀이 나고 침이 마른다. 부장도 긴장했는지 서서히 봉투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끄집어낸다.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대로 된 사표가 맞다는 얘기다.

알았네. 이젠 가봐. 자세한 내용은 밥 먹고 얘기함세.”

, 알겠습니다. 여러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나도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다. 어쨌든 처리됐다.

 

요즘 직원들은 맹랑해.”

왜 그러는데?”

식당에서 마주한 부장과 동료는 오늘도 부하직원들 씹는 재미에 한창이다.

아니 글쎄 사표랍시고 들고 왔는데 봉투 안에 도서상품권이니 이사할인권이 들어있지 뭔가?”

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친구군. 약간 돈 애 아냐?”

뭐 약간 그런 면도 있지. 그런데 또 봉투를 디밀지 뭔가?”

뭐라구? 그러고 또 봉투를 내밀었다는 거야. 그래 그건 진짜 사표였나?”

사표는 무슨 사표? 그냥 백지더라구.”

그래서 어떻게 했나?”

처음에는 이 친구가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는 미쳤다는 걸 알게 됐지. 조용히 돌려보냈지.”

그런 그 직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아마 병원에 있을 거야. 바로 회사에 보고하니까 우선 119로 전화하라고 하더라구. 야근 며칠하고 술 먹으며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도무지 견디지를 못 하더라구. 회사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자진사표를 낸 것으로 처리해 두었어. 어쨌든 본인은 사표를 냈다고 하니까 말이야.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아니, 내가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야. 간호사, 간호사 나는 그저 사표를 제출했을 뿐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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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폭탄을 안고 사는 사나이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어본다. 미세한 울림이 전해진다. 휴우 오늘은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군. 아침에 일어나면 늘 하는 버릇이다.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아침밥을 먹고 일터로 나간다. 하늘은 뿌옇다. 다 공해 탓이다. 언제까지 저런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지. 그래도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다. 앞으로 조심하셔야 하겠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었습니다. 항상 체크하시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심한 운동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한 달 전 나는 사경을 헤매지 않았냐? 막말로 죽다 살아 난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이 약한 나는 가슴에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몇 번인가의 수술 끝에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의사말처럼 조심은 해야 되겠지만.

버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 탈 때이다. 출근길이다.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할 수 없다. 정글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다. 다 불황 탓이다. 너도 나도 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그 덕에 예전에는 앉아갈 수 있던 지하철도 서서가는 신세가 되었다. 힘들다. 오늘따라 직통도 오지 않는다. 계속 연착이더니 급기야 불통이다. 완행을 타야한다. 이미 출근시간에 맞추기는 틀렸다. 휴대폰을 찾는 내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 어디선가 약하지만 강력한 울림이 들린다.

완행전철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사람들이 내뿜는 독한 말이 오염물질이 되어 서로의 가슴을 파고든다. 숨이 찬다. 내리고 싶다. 하지만 내릴 수가 없다. 이리저리 밀리는 와중에 겨우 자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앉는다.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들린다. 내 심장소리가. 그것도 힘차게. 위험하다. 탈출하라. 계속 SOS를 친다. 순간 딱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머리에서 나는 소리다. 이런 고얀놈 노인네가 앞에 서있는데 조는 척 하다니.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판이다. ...앉으...세요. 나는 일어선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쇼하고 있네. 옆에 있던 젊은 아가씨가 내뱉는다. 대항할 기운도 없다.

어디 손잡이라도 잡아야 할 텐데. 쿵쾅쿵쾅 가슴은 계속 요동친다. 어디선가 째깍째깍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내 가슴에 폭탄이 있단 말이에요. 다들 피하세요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나는 말을 잃었다. 구역질만 나올 뿐이다.

헉헉헉 여기가 어디지? 지옥의 문 앞인가? 의식이 흐려진다. 내가 이렇게 죽다니? 말도 안돼. 주변 사람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미친놈 취급이다. 저 아저씨 왜 그래? 아니 뭐야, 저리 안가? 헉헉헉 그게 아니구요? 제발 좀 나가게 해주세요. 죽겠어요. 헉헉헉 내 심장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5. 4. 3. 2. ~~~ 1

아침 83542초 시청역에서 숨을 거둔다. 지금 나는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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