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에잇, 이따위 회사 더 이상 다니나 봐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결심의 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런데 사표가 한자로 뭐지? 한글로 쓴 사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아니 회사를 그만두는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그냥 한글로 쓰자.

사표. 앗차 사포로 쓸 뻔 했다. 축의금 봉투처럼 아예 사표라는 한자를 써놓은 편지봉투를 팔아도 장사가 되지 않을까? 참 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당에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내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이유를 쓴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자 하오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쓰면 이렇다. 나 관둠. 더 이상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알간?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회사도 이젠 빠이빠이다. 그놈의 부장 얼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그런지 약간은 아쉽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양복 윗도리를 챙겨 입은 나는 그대로 돌진이다.

자네, 이게 뭐야?”

사푭니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나? 이유가 도대체 뭔데?”

일신상의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몸은 자네만 안 좋나? 어디 물려받은 유산이라도 있나보지? 베짱이야.”

이런. 울화가 치민다. 언제나 저런 식이다.’

아닙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받아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그럼 내용이나 보지.”

“... ... ”

자네 지금 장난치나?”

아니 왜 그게 거기?”

나한테 뇌물이라도 주는 건가?”부장의 손에는 도서상품권이 들려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나는 허둥댄다.

앗 여기 있군. 다시 받아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기가 막혀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부장은 봉투를 찢으려고 한다.

찢지 마십시오.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 ... 헉 이건 또 뭐야? 이사할인쿠폰이잖아. 자네 지금 죽을라고 환장했나?”

뭐가 잘못된 거지?’나는 본격적으로 초조해진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여기저기 손에 잡히는 봉투는 무조건 윗저고리에 넣어두는 습관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 잡아 먹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안주머니에 또 다른 봉투가 있다. 겉봉에 사표라는 글자도 보인다. 약간 삐뚤어진 정겨운 내 필체. 휴우 다행이다.

이번에 진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봐주십시오.”나는 자신 있게 봉투를 꺼내어 부장의 책상 앞에 놓는다.

자네 더위 먹었나? 아니면 나랑 놀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긴장했나 봅니다. 그러지 말고 결제해 주십시오.”

한번만 더 이상한 게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꼴깍, 이상하다. 분명히 그 봉투 안에는 일신상의 사유 어쩌구 저쩌구가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또 요술을 부릴 것 같다. 손에 땀이 나고 침이 마른다. 부장도 긴장했는지 서서히 봉투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끄집어낸다.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대로 된 사표가 맞다는 얘기다.

알았네. 이젠 가봐. 자세한 내용은 밥 먹고 얘기함세.”

, 알겠습니다. 여러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나도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다. 어쨌든 처리됐다.

 

요즘 직원들은 맹랑해.”

왜 그러는데?”

식당에서 마주한 부장과 동료는 오늘도 부하직원들 씹는 재미에 한창이다.

아니 글쎄 사표랍시고 들고 왔는데 봉투 안에 도서상품권이니 이사할인권이 들어있지 뭔가?”

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친구군. 약간 돈 애 아냐?”

뭐 약간 그런 면도 있지. 그런데 또 봉투를 디밀지 뭔가?”

뭐라구? 그러고 또 봉투를 내밀었다는 거야. 그래 그건 진짜 사표였나?”

사표는 무슨 사표? 그냥 백지더라구.”

그래서 어떻게 했나?”

처음에는 이 친구가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는 미쳤다는 걸 알게 됐지. 조용히 돌려보냈지.”

그런 그 직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아마 병원에 있을 거야. 바로 회사에 보고하니까 우선 119로 전화하라고 하더라구. 야근 며칠하고 술 먹으며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도무지 견디지를 못 하더라구. 회사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자진사표를 낸 것으로 처리해 두었어. 어쨌든 본인은 사표를 냈다고 하니까 말이야.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아니, 내가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야. 간호사, 간호사 나는 그저 사표를 제출했을 뿐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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