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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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은희경은 인기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인기작가란 흔히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있지만 문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주장은 무릇 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탄생한 소설의 본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문학적 엄숙주의가 빚어낸 희비극이다.

개인적으로 은희경씨의 마이너리그를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드라마틱하게 꾸며내는 이야기솜씨에는 혀를 둘렀다. 여성판 성석제라고나 할까? 그녀의 현란한 글솜씨에 반한 탓일까? 그녀의 후속 소설 상속은 조금은 정체된 느낌을 준다. 행여나 인기작가라는 비판에 스스로 이야기솜씨를 억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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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미다스 휴먼북스 3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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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겠는가?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애니 설리번이라는 위대한 선생님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이 인간승리의 연속일수는 없는 법, 헬렌 켈러 또한 장애인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었기에 인간적 갈등이나 약점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위인전에는 나오지 않는 헬렌 켈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헌신적으로만 알았던 애니 설리번 선생이 사실은 불우한 과거를 지닌 소유욕과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으며(물론 헬렌 켈러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지만), 헬렌 켈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간에 알력이 심했으며, 헬렌 켈러가 사실은 부모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는 것들은 위인전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헬렌 켈러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눈과 귀가 먼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 부터가 의문투성이였다. 물론 에디 셜리번의 남편이었던 존 메이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단 그것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그보다는 광범위한 독서가 - 헬렌 켈러는 책읽기를 즐겨했으며, 책을 평생의 친구로 여겼다 - 그녀를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만들었다는 측면이 더 옳다. 실제로 중년이후 헬렌 켈러의 사회활동을 보면 그녀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생계문제와 주변 사람의 만류 등으로 전면에 드러난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그 신념만은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가 생계 때문에 카네기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행위를 몹시 주저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저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정상인과 다름없어 보이는, 아니 무엇인가 성스러운 느낌마저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만 열광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헬렌 켈러는 우리에게 성녀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을 뿐, 그녀가 무엇을 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책은 바로 그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앞을 볼 수 없는 나는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가지를 알려줄 수 있다. 아니 볼 수 있는 크나큰 선물을 받은 이들에게 한가지 충고를 할 수 있다. 내일이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처럼 보라. 내일이면 듣지 못하게 되는 사람처럼 들어라. 음악 같은 목소리들을, 새의 지저귐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을. 내일이면 촉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따뜻하게 만져라.' - p.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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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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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지향주의자들이 환경보호론자들에게 흔히 하는 질문 하나. 성장없는 환경보호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인간이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환경보호는 성장 후에 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닌가?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런 질문을 해대며 먹고사는 문제의 우월성을 과시해왔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우리나라에서만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환경이 성장에 반(反)하는 것이냐 아니냐라는 논란 자체가 생태주의의 커다란 주제로 여져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환경에 반하지 않은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심지어 성장을 위해서는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는 듣기에만 그럴싸한 논리들이 학계에서 판을 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란은 어차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즉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개인 혹은 집단이나 나라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인은 당연히 성장을 헤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환경보존을 주장할 것이고, 환경문제로 직접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경우에는 환경을 배제한 성장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울분을 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앞에서 상식같아 보이는 앞의 주장, 즉 환경에 반하지 않은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심지어 성장을 위해서는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 이 사실은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즉 성장은 수치에 불과할 뿐 개인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의 뉴스에서 올해 우리나라의 성장률이 얼마였고, 내년에는 어느 정도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수치로 보도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매년 되풀이되는 이 연례행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과연 저 수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물론 경기의 동향은 그것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개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수치의 높낮이가 개인의 삶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경제성장을 계속 추구하는 것만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의문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즉 경제성장을 계속하는 것만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성장이 목표가 되는 삶은 결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면서, 그 대안으로 소위 '대항발전(counter development)'를 주장하고 있다.

'대항발전'이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즉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대항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줄이는 발전' 즉 에너지 소비, 경제활동의 시간 등 가격이 붙은 것을 줄여야 하고, 둘째, 경제이외의 것, 즉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활동, 시장이외의 행동,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대항발전'은 경제용어를 바꿔 말하면 교환가치가 높은 것을 줄이고 사용가치를 높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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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
웬델 베리 지음, 정승진 옮김 / 양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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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날 환경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점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양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관점에서 논의되었던 환경문제는 최근 들어 개인의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실천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아마도 문명의 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출판계가 이러한 흐름을 놓칠 리 없다. 반문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오래된 미래가 그 신호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문명을 거부하는 종교단체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Plain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들을 모은 것이다. Plain이라는 잡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녹색평론에 해당하는 잡지인데 그 내용뿐 아니라 출판방식도 철저하게 손 작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글들이 많았다. 특히 '지역문화에 대한 희망과 신념'과 '책임감 있게 먹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최근 생태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생태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 못지 않게 개인의 각성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의 각성이란 스스로를 둘러싼 반생태적 환경에 의문을 갖고 생활습관을 고쳐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인의 각성은 개인의 실천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 전파될 때라야 비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오늘날 지역공동체는 사실상 붕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지역내, 특히 도시에서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다시 새롭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지역의 문제는 결국 지역주민들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지역문제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결사체를 지역이기주의로 호도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소각장을 둘러싼 갈등은 그대표적인 예이다. 소각장 입지를 거부하는 주민들을 마치 지역이기주의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소각장 이외의 다른 쓰레기 처리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우선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설령 소각장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공무원과 업자간에 비밀리에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소각장 건설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즉 주민들의 참여가 배제된 그 어떤 대안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환경문제의 해결은 개인의 각성과 지역사회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전국적 혹은 전세계적으로 전개되기에는 그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더우기 지금과 같이 시장 자본주의가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과연 뜻있는 사람들간의 자발적 결사체가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현 사회의 모순이 개인의 각성과 사회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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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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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소설가이다. 그러나 한창 작가로 명망을 올리던 그녀는 소설을 쓰는 대신 대형 댐 건설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여전사로 돌변했다. 이 책에는 이러한 그녀의 활동의 결과물이 담겨 있다. 나르마다 댐 건설의 문제점을 다룬 '공공의 더 큰 이익'과 핵무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상력의 종말'이 바로 그것이다.

댐건설을 둘러싼 문제는 비단 인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또한 엄청난 규모의 댐들이 지어져 왔으며 최근 들어서도 물 부족 등의 이유로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댐건설은 환경에 큰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댐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주민의 보상 및 이주 문제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선진국가에서는 더 이상 대규모 댐 건설을 건설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일부 가난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공공의 이익(예; 수자원확보, 전기공급 등)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댐이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댐 건설은 공공의 더 큰 이익, 즉 실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 을 헤치는 재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르마다 댐 건설 분쟁은 비단 인도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또한 숱하게 많은 댐들을 건설해 왔다. 그러나 댐건설로 인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최근에 와서야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댐건설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쇄뇌교육을 받아온 셈이다. 오죽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믿고 평화의 댐 같은 것을 건설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동강댐 건설 중단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정부가 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댐을 건설하지 못한 유일한 사례인 듯 싶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동강 댐은 그나마 주변에 수려한 경관과 생태계보존이라는 명분이 있어 중단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댐을 지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실제로 건설교통부는 수자원확보라는 명분으로 호시탐탐 댐건설을 노리고 있다.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서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공의 이익에 대항하는 논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이 실은 부처이기주의나 이해집단의 이익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더욱 큰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업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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