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2disc) - 화보집(60p)+2단 디지팩+아웃케이스
이석훈 감독, 황정민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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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의 장편 대서사시로 널리 알려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일리아드가 전쟁에 출정하여 무공을 세우는 이야기라면 오딧세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겪는 고난을 그리고 있다. 어렸을 적 축약한 글을 읽으면서도 내내 의문에 시달렸다. 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을 장황하게 따로 떼어 서술했을까? 나이가 들어 돌이켜 보니 서양문화의 정수는 바로 후일담에 있음을 알았다. 곧 싸워 이기는 이야기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그러고 나서 겪는 고난은 아무나 말할 수 없다.

 

<히말라야>는 실화에 바탕하고 있다. 실제 등장인물들이 엄홍길 대장을 포함하여 실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세계 최초로 16좌를 등정한 엄홍길에 초점을 맞추어다면 그건 흔한 영웅담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물론 함께 등반한 이들의 경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산에서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원정등산에 나선 이야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정말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전개나 결말은 누구나 예상 가능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원들간의 갈등도 해피엔딩을 포장하기 위한 조미료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석훈 감독의 전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관객들은 열린 결론이나 파격적인 전개에 목말라함을 모르는 걸까? 아무리 고생고생하며 찍은 티가 물씬 나지만 글쎄 보는 사람 처지에서는 섣불리 공감이 되지 않았다.

 

산을 소재로 한 <에베레스트>가 실제 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보다 극적으로 영화를 이끌어 간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한국 관객에게는 신파가 더 편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8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보았겠지. <국제시장>의 등산편이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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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가는 길
이만희 감독, 김진규 외 출연 / 한국영상자료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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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서 <삼포 가는 길>을 상영한다길래 갈까 말까 고민했다. 본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없어 포기했다. 빌려서라도 볼까 했는데 대출불가다. 얻지 못한 물건에는 더욱 아쉬움이 크게 남는 법. 볼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뒤져보니 유튜브에서 공짜로 볼 수 있다. 그래, 바로 보자, 라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려다 아냐, 이건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지, 하고 또 찾아보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 예정. 오케이 바로 이거야.

 

<무녀도>를 먼저 보았다. 김동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무당과 그녀를 어머니로 둔 기독교 신자 아들, 그리고 신내림을 기다리는 처녀와의 갈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개봉 당시에는 윤정희가 무당 역을 맡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지금 보니 미스캐스팅. 늙은 어머니 같지 않아 보여서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 평면적인 전개였다. 오죽 했으면 영화가 끝나자 옆에 계신 노인이 아, 지루해, 라고 했을까?

 

자, 이제부터 본격 게임 시작. <삼포 가는 길>의 첫 장면부터 압도된다. 눈보라가 마치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처럼 휘몰아친다. 백일섭과 김진규가 만나고 이 둘은 도망친 작부를 찾아달라는 술집 여주인의 부탁을 받고 헤매다 결국 문숙을 찾아낸다. 이후 이 세사람의 희한한 여행길이 펼쳐지는데.

 

프랑스 영화 <줄과 짐>이 떠올랐다. 남자 둘과 여자 한명의 조화가 비슷해서다. 그러나 내용은 사뭇 다르다. 한쪽이 세련된 치정극이라면 반대쪽은 거친 인간애의 확인이다. 나는 물론 삼포 쪽이다.

 

덧붙이는 말

 

영화를 보며 이만희 감독의 상상력과 황석영 작가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했다. 원작의 훌륭함을 영상의 치밀함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문숙이 두 남자에게 잡히고 나서 지갑을 눈바닥에 까뒤집는 씬이 대표적이다. 눈밭에 나뒹구는 빵구난 팬티, 낡은 만화, 잡다한 화장품 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문숙이 놓친 처지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

 

한가지 아쉽다면 영화 말미에 문숙을 놓아버리고 도망가는 백일섭의 장면에서 끝이 났다면 훨씬 더 긴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이탈리아 영화 <길>에 버금가는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이후 이야기는 모두 뒷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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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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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들끓게 하던 촛불 시위가 다소 잠잠해졌다. 반면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시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촛불 시위와 같은 거대한 파장은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세상은 큰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작 나는? 

 

나와 세계와의 거리는 쉽게 좁히지 못한다. 마치 먼 행성처럼. 이 두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은 현명해질 것이다. 이를 테면 지구온난화라는 지구적인 문제가 바로 내 옆에서 발생하는 재난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개발을 하는 행태는 바로 잡힐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야말로 학자와 정치가들이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의 원리를 사회에 적절하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한국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를 예로 들어 주된 원인은 자연이며 두번째가 제도라고 한다. 당연히 제도가 우선일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과 북의 지리적 위치를 바꾸고 남쪽을 둘로 나눠 한쪽은 공산주의,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해보아야 제도가 가장 큰 변수임을 증명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싶다가도 역시 접근하는 방식이 남다르다고 감탄했다.

 

고백하자면 나는사회과학에 회의가 강한 사람이다. 자연과학의 원리를 이리저리 적용하다 실패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인문학은 자연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의 여러 결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보완관계를 이룰 수 있다. <인간사회의 비교>라는 원제목은 바로 이런 생각을 실험해보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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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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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죽은 장르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더이상 써먹을 소재따위는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한 이야기는 영속하게 마련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제목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제목은 '화산 자락에서'지만. 위대한 오역인 셈이다. 여름이 주는 나른하면서도 치열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일본은 장인의 나라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를 중심으로 단체를 만든다. 이 조직들끼리 경쟁하는 구도가 또 다른 장인을 만든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화가 없다. 해방이후 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며 살아남기 전쟁이 몰두한 결과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그 문화가 남아 끝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장인 문화는 사회의 안정기가 지속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본 특유의 장인 사회를 축소하여 보여주고 있다. 외양은 건축사무소의 여름 별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촘촘히 짜여진 시스템 사회의 갑갑함과 그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우아한 문장으로.

 

덧붙이는 말

 

일본 소설은 전통적으로 사소설에 근거하고 있다.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보다는 내면의 흐름을 섬세하게 캐치한다.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는 일본이 매우 빈틈없이 꽉 짜여진 사회임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외부의 변화는 소수의 권력자에게 맡기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자기 속으로만 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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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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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취미에 푹 빠졌다.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버려진 가전제품을 보면 가져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디오다. 대부분 철지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들이다. 가끔은 씨디 플레이어 기는이 있는 것들도 있다. 당연히 고장났으니 버렸겠지만 신기하게도 라디오 기능은 살아 있다. 주파수를 잘 맞추다보면 어딘가에선 반드시 아련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컹하며 엄춘다. 팔다리가 잘린 미인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기분이라서 드렇다.

 

<무한화서>의 첫 이야기 0은 이렇게 시작한다.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중략) 무한화서는 및에서 의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꽃이지요.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청량한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다 이 사람 진짜 시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시란 이런 거구요, 저런 감정을 느껴야 한답니다, 라는 식의 겉멋 들린 시인 흉내를 하는 책을 써 냈다면 경멸했을텐데.

 

위로를 받았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행위는 비참하고 추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철 덩어리는 그 참담함을 뚫고 청아한 음악을 들려준다. 마치 진흙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 음악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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