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4. 4. 21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 045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지음, 2001년 8월 초판 1쇄 발행

 

책세상 출판사에서 2000년 봄에 펴내기 시작한
우리시대 문고는 우리 출판계의 새로운 실험이란 점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1980년대 이후 문고판이 독자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것도 다 소설이었지요.
소설이 아니라 해도 대개 고전을 번역해놓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책세상문고의 우리시대 시리즈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소장 인문학자들이
새로이 쓰는 인문교양 문고라는 점에서,
한국 출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 1권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을 읽고,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좀 낯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게 대체 뭔가 하는 궁금증으로 이 책을 사 보았는데,

책의 내용은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다,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정체성이란 게 뭔가 하는 것이더군요.
독자에게 "이런 이런 과정과 방식으로 생각해라" 하는
사유의 교본이랄까요.

이른바 "한국적"이라고 하면
흔히 현대의 우리 모습이 아니라 왠지 옛것, 전통 문화만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다, 한국의 정체는 현대를 살아가는,
뭔가 뒤죽박죽인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인 듯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시대 시리즈 45권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을
산 건 아마 신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를
제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어찌 일본인의 마음을 다 알겠습니까.
다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 문화는 예로부터 "몸"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전에 <세계의 유사 신화>란 책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읽었을 때도
이렇게 에로틱한 신화는 더 없을 거야... 생각했더랬지요.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에는 그 에로틱한 창세 신화
(일본 땅이 생겨난 내력을 이야기하는 신화)가 좀더 자세히 나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신이 관계해서 일본 땅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지요.
일본의 성(性)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니 문란하니 말이 많은데,
어찌 보면 인간, 자기 자신의 몸을
자연 그대로 긍정하는 데서 나온 문화는 아닌지...
우리는 유교 전통 속에서 몸을 꽁꽁 숨기고 가리고,
억압했다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인간의 몸을 중시했다는 건 현실 긍정으로도 이어지나요.
일본의 종교는, 심지어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적 종교도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현실, 현세, 실존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경향이랄까요.
우리나라의 종교들이, 결국 현세의 복을 구하면서도
이승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궁극적 목표를 극락왕생, 죽은 뒤 천국 가는 데 두는 것과는 대조됩니다.

일본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와 일본의 전통 문학, 사상 등등은 모두
사물과 자연의 정조를 느끼는 것을 가장 높은 덕으로 친다고 합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른바 "사물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것",
그걸 "모노노아하레(物哀)"라고 한다는데,
문득 한국의 민간 신앙, 샤머니즘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을 부를 때 호토케(佛 : ほとけ)라 한대요.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가리켜 "고인"이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 말이 "부처님"이란 뜻이라니,
모든 사람이 곧 부처라는, 현세의 모순투성이 인간 하나하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심성이 여기서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고 이 책의 지은이께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또 매년 7월 13일(지역에 따라서는 8월 13일이나 음력 7월 13일)은
오봉(お盆)날이라 하여 우리의 추석 때처럼 국민적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오봉날은 원래 우란분(盂蘭盆), 곧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며
예불을 올리는 불교의 명절에서 왔다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날 타계(주로 산)에 있던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찾아온다 하여, 이날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간다고 합니다.
모든 현세의 존재를 신성시하기에
죽은 우리 자신들(조상이나 죽은 원혼)에 대해서도 삼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현세와 존재 자체를 긍정하다 보니 선악의 엄격한 구별도 모호해,
18세기에 일본 국학을 완성했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모노노아하레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선악의 중요한 관건"으로
본다는군요. 선악의 기준이 윤리적이라기보단 미학적인 셈이지요.

그런가 하면 외부에서 전래된 신앙이고 사상이고 간에
온갖 것이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전통적인 것과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변증법적인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정신적인 잡거성"(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을 이룬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책의 본문을 조금 옮겨보겠습니다.

"일본인은 어떤 새로운 것(타자, 다시 말해 불교)을 수용할 때,
그것을 끊임없이 이전의 것(자기, 다시 말해 신도)과 동화시키고 현재화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형성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냥 계속 첨가되어 축적된다. ...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처럼 자기와 다른 타자를 일단 무한정 포용하여
그것을 자기 안에 평화 공존시키는 일본인의 사상적 관용성을
'정신적 잡거성'이라고 비판했다."(49쪽)

그렇다고 해도 역시 한 나라 사람들, 한 민족의 마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 유학해 불도를 닦고 와서
아주 독특한 종파를 창시한 중세 일본불교의 창시자들은,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절망 끝에 나온 결론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오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입니다.
고백하건대 유물론자였던 제가 모자라나마
자연과 세상 만물에 대해 삼가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게 된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들 덕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노노케 히메>는 최대, 최고 걸작이지요.

책제목에 나오는 아마테라스는 태양신인데,
지금은 보통 여신으로 보지만 고대에는 남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듯... 고대 일본 신도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신이랍니다.

책 끄트머리에 "더 읽어야 할 자료들"이라 해서
일본의 신화나 종교,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책만 있는 게 아니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1990)도 있습니다.
묘하게도, 지금(4월 16일부터 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합니다.
어제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왔는데,
사실 요즘 시간도 여의치 않아
그냥 오랫동안 벼르던 <7인의 사무라이>만 보고 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으며 "더 읽어야 할 자료들"에
이 책의 지은이가

"거장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로는 <라쇼몬>(1950)이라든가
<칠인의 사무라이>(1954)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내게는 <살아가기>(1952)라든가 <붉은 수염>(1965)을 보면서
밤새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꿈>은 여덟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인데,
그 중 제1화 <여우비>, 제2화 <복숭아밭>, 제5화 <까마귀>,
제8화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쓴 부분을
본 것입니다.

<살아가기>는 <이키루生きる>인 것 같고,
<이키루>와 <붉은 수염>, <꿈>까지 다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합니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 책을 산 건 2001년 9월이고,
올 3월 초부터 계속 읽으려고 갖고 다니다가,
하필이면 지금에야 다 읽었습니다.
진작에 읽었으면 지은이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했던 것도 다 까먹었을 텐데.
무슨 인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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