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 청아출판사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살을 이해하려면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의 고전”이라고 표지에 떡 쓰여 있는데도, 난 막연히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설명을 기대했나 보다. 그러나 “사회학적 연구의 고전”답게, 이 책은 자살이란 ‘개인적인 행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회적 병리 현상이고, 이에 대한 치유책도 사회 조직에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자살에 대해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탐구할 필요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책을 찾아봐야겠다.)

영문판을 대본으로 삼아 중역하면서도 종종 불어 원서를 참조한 듯 보이는 영문학자의 번역이 나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연구 논문으로 쓰인 책이기에 수많은 표와 수치 해설로 점철된 1부와 2부는 잠 안 올 때 읽기 딱 좋았다. 대체로 지은이의 주장에 동감하긴 하지만, 그리고 지은이의 냉철한 논리에 허를 찔리는 느낌도 들었지만, 가끔은 표를 해석하는 방식이 자의적이란 느낌이 들고, 표의 수치와 본문의 수치가 어긋나기도 해서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사회학 연구 대상이 객관적인 실체여야 하는 이유를 밝힌 뒤, 1부에서는 자살이 개인적 충동이 아니라(개인적 충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기는 하겠으나) 바로 ‘객관적인 실체’로서 사회학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고자 한다. 흔히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은 어떤 정신적인 병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미쳐서 자살해버렸다는 식으로), 그러나 자살은 정신병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다. 정신 이상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으나 모든 자살자가 정신이상자는 아니며, 어떤 사람이 술 취한 상태에서 자살할 가능성도 있으나 그가 술에 취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적 흥분 상태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으나 그 원인은 따로 있다.

2부에서는 모든 자살이 동일한 현상이 아니며 개인주의가 극대화한 데서 기인한 자살(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서 죽는다), 집단에 대한 결속감이 지나친 데서 기인한 자살(공동체 차원의 높은 가치를 위해서 죽는다), 사회적 가치관 혼란에 따른 상실감에 기인한 자살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서 보자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분신을 택했던 분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운동가의 자살이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하겠다. 그리고 몇 년 전 기업을 경영하던 이들이나 고위 관료였던 이들이 잇따라 자살했던 현상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하겠지? (잠시 애도.) 물론 이것은 자살의 동기가 아니라, 자살 경향을 낳는 사회의 흐름이다. 그러한 자살 경향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소수이며, 그 동기는 본인만이 아는 것이다.

비로소 3부에 이르러서 책이 재미있어진다. 2부에서 주장한 원인들이 어떻게 해서 자살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해법은 무엇인지 썼는데, 우선 표가 없어서 살 것 같았다. 혁명기에는 자살률이 급격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차원의 높은 가치를 두고 열정에 휩싸이면 자살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동체 차원의 가치를 구현할 만하다고 제시한 것이 “회사”라는 ‘직업공동체’라니, 이 책이 19세기 말에 발표되었다는 점이 실감난다. 만약 에밀 뒤르켐이 요즘에 살아서 이 책을 썼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원시생활을 하는 사회를 “야만 사회” “미개 사회”로 본다거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미개한 상태라서 자살률이 낮다고 한 데에서도 역시 19세기 서구 남성 지식인의 시각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공동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조직은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기쁘게 긍정할 수 있도록 가치를 부여할 만한 곳은.


덧붙임 1. 국립국어원이 정리한 인명 표기안에 따르면 지은이의 이름은 “에밀 뒤르켕”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덧붙임 2. 가끔 문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만한 오탈자가 눈에 띄는데, 나는 1997년에 찍은 3쇄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요즘 유통되는 책에서는 이 부분이 고쳐졌나 서점에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올해까지 여러 번 쇄를 거듭해서 찍었는데도 잘못된 부분들이 그대로였다! 책이 나온 지 10년이 넘도록 오탈자를 고치지 않다니. --+

덧붙임 3. 1997년 5월 22일 장백서원에서 산 뒤 고이 꽂아만 두었던 이 책을 꺼내도록 자극해주신 바람구두님, 고맙습니다.

자살론 | 원제 Le Suicide(1897)
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 (지은이) |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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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11-0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뒤르크하임이라고도 하더군요 이름을 불어식으로도 읽고 독어식으로 읽기도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기억이 안 나네요^^

조선인 2005-11-0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잘못 배워서 큰일이에요. 뒤르껭이 입에 딱 달라붙어 있어요.

릴케 현상 2005-11-0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할 때는 뒤르껭이 맞잖나요^^ 표기법의 문제죠.
참 언젠가 변정수씨 글을 보니 한국의 식자들이 곧잘 주장하는 '원어 발음 대로'라는 게 그야말로 한국식 사고라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뒤르껭'이라고 소리가 나니까 그렇게 써야 한다고 하면서 외래어표기법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뒤르껭'과 '뒤르켕'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몰겠지만=3=3=3

숨은아이 2005-11-0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뒤르크하임이라고도 한다고요? 아마 그가 로렌 지방 태생이라 그런 모양이네요. 알사스와 로렌, 독일이랑 프랑스랑 서로 뺏고 빼앗겼던 지방이고, 독일 계통 주민이 많이 사는 동네라면서요.
조선인님/그냥 뒤르껭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카뮈"라고 하는 것보다 "까뮈"라 하는 쪽이 더 발음하긴 편하잖아요. 외국어 이름은 표기랑 발음을 통일하기 어려워요. -.-
다시 산책님/맞아요, 표기법의 문제죠. 근데 프랑스 사람들이 뒤르껭과 뒤르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요? 흐음, 프랑스어의 발음 체계가 가장 정교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외래어 표기법이란 한국 사람들끼리 표기의 편의를 위해 정한 거지만, 왜 경음 표기를 피하도록 정했는지 모르겠어요.

조선인 2005-11-0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연구원에서는 경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원래 우리 말에 경음이 이렇게 많지 않은데,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이 퍽퍽해진 탓이라나. 문제는 경음강화가 시작된 전쟁이 임진왜란부터라고 하니, 과연 6.25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숨은아이 2005-11-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경음이 좀 속되게 느껴지나? 그런 경우도 있지만...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 청아출판사 / 1994년 1월
구판절판


교육은 사회의 표상이며 반영일 뿐이다. 교육은 사회를 간추린 형태로 모방하고 재생하는 것이지 사회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사람들 자신이 건강할 때에만 건강할 수 있다. 교육은 스스로를 수정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을 따라서 병든다. 도덕적 환경이 병들어 있을 때에는 교사들 자신이 그와 같은 환경 속에 살며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들은 학생들을 자신이 받은 영향과 다른 방향으로 교육시킬 수가 없게 된다. 새로운 세대는 언제나 그 전 세대에 의해서 양육된다. 따라서 후계자가 향상되기 위해서는 선행자가 향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순환적이다. 이따금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관념과 열망을 가진 개인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독립된 개인들은 사람들의 도덕적 특질을 개조할 수 없다. -404쪽 쪽

물론 우리는 하나의 웅변으로 사회가 기적적으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중략)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에 의해서 사회체계와 반대되는 교육제도가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상반성으로써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도덕적인 상태가 근거하는 집합적 조직이 온전하다면, 어린아이들은 집합체와의 접촉의 순간부터 그 영향을 느끼게 된다. 그에 비해서 학교와 인위적인 환경은 아이들을 일시적으로 아주 약한 힘으로만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교육은 사회 자체가 개혁됨으로써만 개혁될 수 있다. -404-405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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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1-0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내 아이가 더 나은 사회에 살기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 혼자만 바뀌면 소용이 없고, 사회가 같이 바뀌도록 애써야 한다.

글샘 2005-11-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다고도 하지요. 자녀 교육은 부모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저 개혁이란 말이 왜 자꾸만 멀어지는지 몰라도, 진보쪽에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도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번에 약속한 것을 파기하고, 교사를 평가해 보겠다고 난리 법석이네요. 정말 병든 사회에서 건강하지 못한 교육 현장에 서 있는 것은 곤혹스런 일임을 새삼 깨닫는 나날입니다.

숨은아이 2005-11-03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선생님들 힘드시겠어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지 6개월은 된 것 같다. 그렇게 오래 끌다니 너무 심했지. 그게 처음에는 밤에 잠 안 올 때 읽기 시작하다가, 그 다음에는 외출할 때 전철 안에서 읽기로 한 탓에 그렇다. 요 6개월 사이에 전철 타고 외출할 일이 한 달에 서너 번이나 될까 말까 하다 보니, 이 책이 가방 속에서 그냥 잠자는 날이 많았다.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이라는 주제를 달고 있지만, 이 책의 진정한 주제는 “비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북유럽 사회의 경향과 한국 사회, 그리고 세계적인 질서를 견주면서 끊임없이 “자아와 타인에 대한 비폭력”을 주장한다. 박노자 선생의 첫 책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비판”이라면 이 책은 비판과 함께 대안 모색이랄까. 2002년에 나온 책인데, 3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 뭐라 덧붙일 말도 없다.

앗,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구나. 노르웨이에서 군대 해산을 주장하는 우파 정치인들은 “군대를 해산시키는 대신 나토 기부금을 늘려 안보 분야에서 나토에 의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노르웨이군의 기존 전략이 어차피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며 나토 구원군 도착을 대기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그렇게 놀라운 발상은 아니”라고 한다. 으허, 군의 전략이 나토군 도착을 기다리며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는 거라니? 혹시 한국군의 기본 전략도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며 미군이나 유엔군의 도착을 대기’하는 거 아냐? 그렇거나 말거나, 그런 생각이 군대 해산의 기본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국 젊은이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대신(군대라는 강제적 살인 기관 속에 몰아넣지 않는 대신), 돈을 내어 타국 젊은이들의 군대에 기대겠다는 것 아닌가? 좌파는 같은 군대 해산을 주장하면서도 이와 달리 “공동 스칸디나비아 병력의 창립과 구소련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와 지원을 통한 전쟁발발 위험의 봉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의 끝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징역형을 받은 오태양 씨와 지은이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가 “데몰리션맨”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런데 어젯밤에 마침 케이블 TV에서 그 영화를 해주더군.) 실베스타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는 시대 배경이 2032년인데, 이 시대에는 누군가 욕을 하면 경고와 함께 벌금을 물리는 쪽지가 벽에서 튀어나오고, 악당들은 모두 냉동된 채 잠들어 있어 폭력 범죄라는 게 없다. 이 부자연스러운 사회를 실베스타 스탤론이 남성적인 박력으로 뒤흔든다. “비폭력”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이처럼 무식하게 드러낸 영화도 없지 않을까. 시민을 항상 감시하고 단지 욕만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비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범죄자에게 신체와 생활의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 어찌 비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욕만이 언어폭력일까? 욕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아주 점잖고 세련된 말만으로, 얼마든지 사람을 짓밟을 수 있다.

눈에 쏙쏙 들어오는 박노자 선생의 글을 읽다가, 이 사람은 어째 이렇게 읽기 좋게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자살론]의 재미없는 번역을 읽던 참이라 더욱 비교되었다.) 그건 이 사람이 신문 기사처럼 글을 쓰기 때문인 것 같다. 웬만한 번역서보다, 아니 초등학교 국어부터 다시 배웠으면 싶은 이른바 “전문가”들의 제멋에 겨운 글보다 훨씬 문장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심지어 토박이 작가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문장보다 그의 글이 더 이해하기 쉽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사투리와 국문학을 소홀히 하며 자란 탓에 토박이 우리말을 종횡무진 구사한 글은 외국어만큼이나 한 번에 읽어 내리기 어려운, 슬프고 부끄러운 사정이 있다. 그런데 딱 신문에 나오는 정도 어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을 정확히 간결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냥 술술 읽어 넘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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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1-0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교수에게서는 점잖은 학자의 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아요..

로드무비 2005-11-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디터로 쓰기 눌러야 댓글 저장됨!)

6개월 동안 꼼꼼히 읽은 리뷰답습니다.

박노자 씨의 글은 정말 쉽게 재밌게 읽히죠?^^


릴케 현상 2005-11-0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방에 있는 한국군의 임무는-적어도 사병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3분간 적을 저지하며 전멸하기예요^^

숨은아이 2005-11-0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점잖고 명랑한 학자의 냄새가 풍기죠. ^^
로드무비님/댓글 한번 날리셨군요. 이런... 시간만 오래 걸렸지 꼼꼼하게 읽느라고 그런 건 아닌데... ^^a 공감 고맙습니다.
산책님/흐음, 그 소린 들어본 것도 같아요. -ㅂ-;

릴케 현상 2005-11-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근데 병장들의 속셈은^^ 3분 채우기 전에 자살하겠다는 쪽이던데~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려나 ㅋㅋ

숨은아이 2005-11-0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겠죠.

마태우스 2005-11-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었어요. 같은 책 읽으니 반가운데요? 박노자의 존재가 우리에겐 참 소중한 것 같습니다.

숨은아이 2005-11-0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독서량을 제가 따라갈 수가 있나요. ^^
 
조선의 왕비
윤정란 지음 / 차림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호랑녀님 리뷰 보고 읽고 싶다 생각했는데 절판되어 속절없이 보관함에 두고 있다가, 호랑녀님이 빌려주셔서 읽었다. 절판되기는 아까운 책이라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이가출판사에서 2003년에 다시 나온 모양이다. 조선 왕조사를 왕비 중심으로 요약 정리한 품새라, 읽다 보니 “용의 눈물” “장희빈” “여인천하” 등등이 한줄기로 엮이는 기분이 든다.

정치경제사 중심으로 역사를 배우다 보면 어느 한구석에서도 여성을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공적인 영역은 모두 남성 지배계층이 장악한 결과, 마치 그 시대에는 여성이 살지 않기라도 한 듯이 책 속의 역사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주로 남성인 왕과 정치가다. 어린이 역사책을 만들 때의 경험인데, 책 전체에 걸쳐 그림에 여성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군중 장면에서는 여성과 남성을 고루 그리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장면이 없는 것이다. 화가가 여성인데도, 특별히 성별을 지정하지 않는 한 남성만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려오는 경우가 많다. 화가와 함께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서로 충격을 받아 그림 설정을 다시 하기도 했고, 정치와 전쟁 중심으로 진행된 책인 경우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왕 그림 옆에 왕비 하나 억지로 끼워 넣기도 했다. 화가와 편집자의 상상력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적으로 세뇌된 결과라 할까. 그래서, 이렇게 과거에 살아 움직였던 여성들을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고맙다.

다만 500년 조선 왕조의 왕비들을 한 권에 모두 담은 책이라 왕비 한 사람 한 사람을 집중 소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공식적인 역사 기록 이곳저곳에서 왕비에 관한 부분을 모아 정리한 내용이기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당시 사관에 따른 왜곡인지 밝히기에는 지면이 부족했다. 좀더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만한, 다른 책들이 출간되기를 바란다.

문장은 대체로 읽기 쉬운 편이지만, 협군 육궁 봉사(封事) 궤장(几杖) 등등 단박에 알아듣기 어려운 역사 용어들을 한자도 병기하지 않고 그냥 쓴 것이 불만스럽다. 무슨 말인지 몰라 읽는 중간중간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던데, 이가출판사에서는 바로잡아 냈는지 모르겠다. 잘못된 부분을 적어보자면,

첫째, 143쪽에 장렬왕후 “조씨는 숙종 14년에 세상을 떠났다. ... 나이는 전비 인렬왕후 한씨가 임신했던 때와 같은 마흔두 살에 불과했다.”고 했는데, 138쪽에 나온 대로 장렬왕후는 1624년생이니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면 1666년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장렬왕후는 1688년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136쪽에 보면 인렬왕후는 마흔둘이 아니라 마흔넷에 임신했다고 나온다.

둘째, 173쪽에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시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인 김우명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그런데 민씨는 1681년에 왕비가 되었지만, 이 책 163쪽에 김우명은 1675년에 죽었다고 했다.

셋째, 213쪽에 정성왕후 서씨는 “1757년 2월 15일 예순여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 200쪽에서는 175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나온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보를 제공하는 ‘엠파스 한국학지식’에서 검색해본 결과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것은 1757년이 맞다.

넷째, 241쪽에는 [춘추]를 “중국 노나라 사관이 만든 책에 공자가 첨삭한 유교경전으로, 기원전 722년부터 242년에 걸친 춘추시대의 역사책”이라고 했는데, [춘추]가 다루는 시대는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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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발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원작은 1982년에 발표되었다.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와 “기억의 서”, 두 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폴 오스터가 소설로 유명해지기 전인 30대 초반, 형식의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쓴 수필이란다.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는, 한 절반 읽을 때까지 내가 지금 왜 남의 아버지 이야기를 읽고 있지 싶을 만큼 사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작가 아버지의 인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면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냉혈한”이라거나, 그렇다고 “인정 많은 집주인” 따위로도, 한 사람이 단순히 정의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선하거나 그저 악하지 않은, 그러나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사람.


“기억의 서”는 참 두서없어 보인다. 읽다가, 가만,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뒤의 이야기라면, “기억의 서”는 서서히 진행된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체험한 이야기인가? 아니, 그보다는, 외할아버지-아버지-작가-작가의 아들로 이어지는, 삶의 반복, 그 무의미에 대한 이야기인가? 늙고 썩어가는 것이 예정된 생명들.


작가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건물의 10층에 작은 방을 마련하고, 여기선 오직 쓰거나 자기만 한다. home 느낌이 전혀 안 나는, 그래서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납작 엎드려 은신해야 할 때나 머무를 만한 공간이다. 작가는 안나 프랑크가 숨어 지내던 방 이야기를 하고, 그 방에 묻힌 기억을 이야기한다. 고립된 방에서 이 글을 쓰는 작가, 그는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서 제페토 영감을 구한 이야기를, 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달아났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 이야기와 연결한다. (폴 오스터가 유대인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제페토 영감과 요나가 은신했던 고래 뱃속, 이 방은 그 고래 뱃속과 같다.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데, 작가는 마침내 말한다.

그가 쓰고 있는 책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기에는 세상과 그 세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곧 세상에 있는 것이다. 자물쇠 안에서 부러진 열쇠,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말하자면 열쇠가 자물쇠 안에서 부러졌다는 것이다. - 259-260쪽


(하하. 여기서 “그”는 작가 자신이다. “기억의 서”에서, 작가는 화자를 “나”라고 하지 않고, 자기 이름, 오스터Auster의 머리글자를 따서 A라는 3인칭을 쓴다.)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 260쪽


그렇다면, 작가는 자기가 그 방에 왜 있는지, 왜 이 글을 쓰는지, 스스로 답을 구하기 위해 글을 써나간 게 아닐까.


번역에 대해 사소한 지적 하나. 고흐가 자기 침실을 그리고서 그 그림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써 보낸 편지를 일부 인용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너도 어느 날엔가는 다른 방들을 스케치하게 할 거야. -250쪽


이상해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를 뒤져, 바로 그 부분을 찾아보았다.


언젠가는 너를 위해 다른 방도 스케치할 생각이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4쪽


문맥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옮길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맥락이 중요해.


고독의 발명 | 원제 The Invention of Solitude

폴 오스터 (지은이), 황보석 (옮긴이) | 열린책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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