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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발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원작은 1982년에 발표되었다.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와 “기억의 서”, 두 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폴 오스터가 소설로 유명해지기 전인 30대 초반, 형식의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쓴 수필이란다.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는, 한 절반 읽을 때까지 내가 지금 왜 남의 아버지 이야기를 읽고 있지 싶을 만큼 사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작가 아버지의 인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면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냉혈한”이라거나, 그렇다고 “인정 많은 집주인” 따위로도, 한 사람이 단순히 정의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선하거나 그저 악하지 않은, 그러나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사람.
“기억의 서”는 참 두서없어 보인다. 읽다가, 가만,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뒤의 이야기라면, “기억의 서”는 서서히 진행된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체험한 이야기인가? 아니, 그보다는, 외할아버지-아버지-작가-작가의 아들로 이어지는, 삶의 반복, 그 무의미에 대한 이야기인가? 늙고 썩어가는 것이 예정된 생명들.
작가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건물의 10층에 작은 방을 마련하고, 여기선 오직 쓰거나 자기만 한다. home 느낌이 전혀 안 나는, 그래서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납작 엎드려 은신해야 할 때나 머무를 만한 공간이다. 작가는 안나 프랑크가 숨어 지내던 방 이야기를 하고, 그 방에 묻힌 기억을 이야기한다. 고립된 방에서 이 글을 쓰는 작가, 그는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서 제페토 영감을 구한 이야기를, 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달아났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 이야기와 연결한다. (폴 오스터가 유대인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제페토 영감과 요나가 은신했던 고래 뱃속, 이 방은 그 고래 뱃속과 같다.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데, 작가는 마침내 말한다.
그가 쓰고 있는 책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기에는 세상과 그 세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곧 세상에 있는 것이다. 자물쇠 안에서 부러진 열쇠,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말하자면 열쇠가 자물쇠 안에서 부러졌다는 것이다. - 259-260쪽
(하하. 여기서 “그”는 작가 자신이다. “기억의 서”에서, 작가는 화자를 “나”라고 하지 않고, 자기 이름, 오스터Auster의 머리글자를 따서 A라는 3인칭을 쓴다.)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 260쪽
그렇다면, 작가는 자기가 그 방에 왜 있는지, 왜 이 글을 쓰는지, 스스로 답을 구하기 위해 글을 써나간 게 아닐까.
번역에 대해 사소한 지적 하나. 고흐가 자기 침실을 그리고서 그 그림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써 보낸 편지를 일부 인용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너도 어느 날엔가는 다른 방들을 스케치하게 할 거야. -250쪽
이상해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를 뒤져, 바로 그 부분을 찾아보았다.
언젠가는 너를 위해 다른 방도 스케치할 생각이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4쪽
문맥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옮길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맥락이 중요해.
고독의 발명 | 원제 The Invention of Solitude
폴 오스터 (지은이), 황보석 (옮긴이) | 열린책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