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지 6개월은 된 것 같다. 그렇게 오래 끌다니 너무 심했지. 그게 처음에는 밤에 잠 안 올 때 읽기 시작하다가, 그 다음에는 외출할 때 전철 안에서 읽기로 한 탓에 그렇다. 요 6개월 사이에 전철 타고 외출할 일이 한 달에 서너 번이나 될까 말까 하다 보니, 이 책이 가방 속에서 그냥 잠자는 날이 많았다.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이라는 주제를 달고 있지만, 이 책의 진정한 주제는 “비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북유럽 사회의 경향과 한국 사회, 그리고 세계적인 질서를 견주면서 끊임없이 “자아와 타인에 대한 비폭력”을 주장한다. 박노자 선생의 첫 책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비판”이라면 이 책은 비판과 함께 대안 모색이랄까. 2002년에 나온 책인데, 3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 뭐라 덧붙일 말도 없다.

앗,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구나. 노르웨이에서 군대 해산을 주장하는 우파 정치인들은 “군대를 해산시키는 대신 나토 기부금을 늘려 안보 분야에서 나토에 의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노르웨이군의 기존 전략이 어차피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며 나토 구원군 도착을 대기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그렇게 놀라운 발상은 아니”라고 한다. 으허, 군의 전략이 나토군 도착을 기다리며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는 거라니? 혹시 한국군의 기본 전략도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며 미군이나 유엔군의 도착을 대기’하는 거 아냐? 그렇거나 말거나, 그런 생각이 군대 해산의 기본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국 젊은이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대신(군대라는 강제적 살인 기관 속에 몰아넣지 않는 대신), 돈을 내어 타국 젊은이들의 군대에 기대겠다는 것 아닌가? 좌파는 같은 군대 해산을 주장하면서도 이와 달리 “공동 스칸디나비아 병력의 창립과 구소련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와 지원을 통한 전쟁발발 위험의 봉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의 끝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징역형을 받은 오태양 씨와 지은이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가 “데몰리션맨”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런데 어젯밤에 마침 케이블 TV에서 그 영화를 해주더군.) 실베스타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는 시대 배경이 2032년인데, 이 시대에는 누군가 욕을 하면 경고와 함께 벌금을 물리는 쪽지가 벽에서 튀어나오고, 악당들은 모두 냉동된 채 잠들어 있어 폭력 범죄라는 게 없다. 이 부자연스러운 사회를 실베스타 스탤론이 남성적인 박력으로 뒤흔든다. “비폭력”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이처럼 무식하게 드러낸 영화도 없지 않을까. 시민을 항상 감시하고 단지 욕만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비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범죄자에게 신체와 생활의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 어찌 비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욕만이 언어폭력일까? 욕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아주 점잖고 세련된 말만으로, 얼마든지 사람을 짓밟을 수 있다.

눈에 쏙쏙 들어오는 박노자 선생의 글을 읽다가, 이 사람은 어째 이렇게 읽기 좋게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자살론]의 재미없는 번역을 읽던 참이라 더욱 비교되었다.) 그건 이 사람이 신문 기사처럼 글을 쓰기 때문인 것 같다. 웬만한 번역서보다, 아니 초등학교 국어부터 다시 배웠으면 싶은 이른바 “전문가”들의 제멋에 겨운 글보다 훨씬 문장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심지어 토박이 작가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문장보다 그의 글이 더 이해하기 쉽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사투리와 국문학을 소홀히 하며 자란 탓에 토박이 우리말을 종횡무진 구사한 글은 외국어만큼이나 한 번에 읽어 내리기 어려운, 슬프고 부끄러운 사정이 있다. 그런데 딱 신문에 나오는 정도 어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을 정확히 간결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냥 술술 읽어 넘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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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1-0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교수에게서는 점잖은 학자의 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아요..

로드무비 2005-11-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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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꼼꼼히 읽은 리뷰답습니다.

박노자 씨의 글은 정말 쉽게 재밌게 읽히죠?^^


릴케 현상 2005-11-0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방에 있는 한국군의 임무는-적어도 사병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3분간 적을 저지하며 전멸하기예요^^

숨은아이 2005-11-0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점잖고 명랑한 학자의 냄새가 풍기죠. ^^
로드무비님/댓글 한번 날리셨군요. 이런... 시간만 오래 걸렸지 꼼꼼하게 읽느라고 그런 건 아닌데... ^^a 공감 고맙습니다.
산책님/흐음, 그 소린 들어본 것도 같아요. -ㅂ-;

릴케 현상 2005-11-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근데 병장들의 속셈은^^ 3분 채우기 전에 자살하겠다는 쪽이던데~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려나 ㅋㅋ

숨은아이 2005-11-0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겠죠.

마태우스 2005-11-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었어요. 같은 책 읽으니 반가운데요? 박노자의 존재가 우리에겐 참 소중한 것 같습니다.

숨은아이 2005-11-0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독서량을 제가 따라갈 수가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