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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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자꾸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는 것 같아서 못 견딜 때, 그 바람을 다독이고 나를 편안하게 잠 재워 줄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런 사람은 평생 내 곁에 두고 말겠다는 욕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매일 새벽 세시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북풍이 창가로 불어오는 날씨인 것도 아닌데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져버려요.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10할에서 다만 1할이 모자라는 수준이라면, 9할이 모자란 사람보다 더 욕심사납게 1할을 갈망하고 사는 존재. 슬프지만, 변명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그저,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 작가는 로맨스 소설이라는 이쁘장한 포장으로 슬며시 일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우리나라 영화 <접속>이나, 외국 영화 <유브 갓 메일>이랑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이 소설의 내용이 다 읽고나면 뜨끔한 구석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랑한다고 여기는 사랑이, 정말 모두 사랑일까요. 진부하지만 다시 이런 질문을 되뇌이게 하는 힘이 있는 소설입니다. 누구도 함부로 좋아하거나 함부로 싫어하지 말라는, 말은 쉽지만 참 따르기 어려운 주문을 하고 있는 소설이에요.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의 입장 같은 거, 제대로 생각하면서 사랑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온라인 교감에서, 마음껏 내 주장만 하고 내 본연의 모습만 펼치는데서 자위하고 마는 걸 사랑이라고 오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날만 밝으면 또 여의도 어디선가 병신 꼴깝 (죄송합니다. -_-)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열을 받느니, 난 그냥 말랑말랑한 로맨틱한 이야기나 읽을래 하고 집어든 이 소설은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원초적으로 무거운 생각을 하게 만들어버렸지만, 그래도 참,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는 점에서,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뻔한 줄다리기처럼 보이는데도 남과 여가 다른 무엇도 아닌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매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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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9-01-0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착하게 가라앉히는 리뷰네. 제목에 끌려 찜해두었던 책인데.
제목 한줄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

치니 2009-01-09 12:25   좋아요 0 | URL
사실 언니가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곧 들었어. 그 이유는 읽어보면 알 것이네. 후후.

가시장미 2009-01-0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좋네요. ^^ 사실 이 책 저도 읽고 있는데..마침 이 리뷰를 보니 참 반갑네요!
소설 속 두 사람. 참 매력적이고 한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그 재치와 유머와 센스..
참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크크

치니 2009-01-09 13:37   좋아요 0 | URL
네, 재치,유머,센스를 쉼 없이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연애소설, 정말 아무나 쓰는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읽고 있는 중이시라니, 이거 좀 스포일러가 되나 싶기도 한데요. ^-^

2009-01-09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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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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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1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재미있는 연애 소설은 저도 오랜만이었어요. 대부분은 유치해지느라 재미가 휙 사라져버렸는데 말이어요.

치니 2009-01-10 12:18   좋아요 0 | URL
네, 그 점에서 작가의 역량을 높이 사게 되더라구요, 저도.
쥬드님이 올해에 가장 인상적인 책으로 꼽아놓으신 것도 이 책을 고르게 하는데 한 몫한 거 아시죠? ^-^

라로 2009-01-10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것 나름 재밌게 읽었어요~. 뭔가 가벼운듯 하면서 묵직한,,,묵직한 정돈 아닌가? 암튼ㅎㅎㅎ
조근조근 말하는 듯한 님의 리뷰가 정겨워요~.
새벽7시(요즘은 7시도 넘 어두워서리~) 눈이 내리나요?
여긴 내려요,,,^^

치니 2009-01-10 12:20   좋아요 0 | URL
가벼운 것도 무거운 것도 아닌, 이런 연애소설에 적합한 용량을 가진 센스가 돋보여였어요.
거긴 눈이 내리는군요. 아, 부러워요. 서울은 너무 오래 눈이 안오네요.

2009-01-11 2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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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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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9-01-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재밌죵. 한번쯤 실행해보고픈?

치니 2009-01-12 17:56   좋아요 0 | URL
니나님도 읽으셨군요. 이 책이 알라디너들에게 인기가 좋네요. ^-^
실행은, 저더러 하라면 노우입니다. 아이고 골 아파라, ^-^;;

니나 2009-01-13 14:31   좋아요 0 | URL
저도 치니님 처럼 멋진 아들내미가 있다면 귀찮을 듯 해요 ^^(잠 안오는 날 치니님 서재 클릭클릭하다가 아드님 기타치는 동영상에 쓰러진~ )

치니 2009-01-13 15:10   좋아요 0 | URL
하핫, 니나님 그 옛날 동영상 보셨구나. 이젠 그 때의 보송보송함이 거의 사라지고 콧수염까지 났답니다.
음, 아들내미가 있어 든든하기도 하지만 (쿨럭 ㅋㅋ), 그보다는 제가 소위 줄다리기 라는 걸 못해서요.
연애할 때도 그냥 내가 좋으면 확 좋아하고 말면 말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그래보질 못했어요. 그러니 이 책의 여성처럼 행간을 잘 들여다봐야 하는 언어 구사를 하기란 글렀고, 상상만 해도 머리 아포요. ㅋㅋ

2009-01-12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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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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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14: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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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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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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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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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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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2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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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1-18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국내에 번역된 게 없는 것 같더라구요. 나오기만 해봐요, 어디. 쏜살같이 읽어주겠어요. 흐흣.

치니 2009-01-21 10:12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봤는데 없드라구요. 이 책은 이메일이지만 대화체를 쓴 형식이라, 다른 형식에서는 어떤 필력을 보여줄 지, 그게 궁금한데 말이죠. 혹시 나왔는데 제가 모르면 다락방님이 쏜살같이 알려주시기에요 ~ :)

다락방 2009-01-30 08:08   좋아요 0 | URL
걱정마시어요, 치니님. 흐흣 :)
 
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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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부터 뻘짓이다.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라는 저 제목은 <게 공선>을 검색하자 바로 밑에 나온 공선옥(공선이라는 단어 때문에 같이 검색된) 책의 제목인 것.  

아무튼 그렇다, 이 책을 읽고나면 사.는.게.거.짓.말.같.을.때.가 정말로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1930년대에 작가가 쓴 이 책이 현 세대에 주는 의미는 자못 크지만 심정적으로는 그 반대였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읽는다.  

그 때 그렇게 고통 받던 노동자들이 아직도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한다면, 도대체,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한번이라도 받아들여주고 있는 걸까 싶고, 인간이라는 종족이 하는 짓이라곤 무한반복 속에서 이기심을 차곡차곡 늘려가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인가 싶고.  

지독한 고문에 가까운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태업을 했을 때 공장 안의 감독은 생각 외로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가하지 않았고, 파업을 했을 때 감독은 의외로 태연했지만 사실은 윗선을 불러 공권력으로 해결하려는 꿍꿍이가 있었고, 윗선은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제압하는가 싶더니 파업을 막지 못한 감독을 잘라버려서 윗선 편에 서서 똥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감독에게 '내 편이라고 생각한 쪽이 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노동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대항하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스토리.  

눈물이 날 정도로 현실과 닮아 있는 이 스토리에서, 영하 10도의 추운 새해벽두부터 길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방송언론인들을 우선 떠올린다. 귀족들의 놀음이라고? 박혜진 아나운서가 명품을 입고 전단지를 돌리니까 더 그렇게 보인다고? 1억 연봉이라고? 이러지들 말자. 뭉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다시 지난 해 말처럼 뒤로 가는 민주주의를 할 사람인데도 돈 좀 벌게 해줄까봐 뽑아주고, 지난 여름처럼 아이들을 배반할 사람을 내 아이 돈 좀 벌게 해줄까봐 뽑아주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 게 공선의 노동자 신세가 될텐가. 그 때는 좀 더 여유있게 사는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살 수가 없는 지경이 될 게 뻔한데도. 제발, 이제는 내가 살자고 남 모르겠다 하지 말고 남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산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나부터!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6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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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3 1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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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3 1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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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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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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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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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 - 프랑스 어느 작은 시골 마을 이야기
신이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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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고나면, 내가 먹는 음식들이 죄다 쓰레기 같아 보이기 시작하고, 아름다운 산과 들판이 코 앞에 있지 않은 비좁은 서울 시내 구석의 다세대 주택 내 집도 한없이 초라해져버리는 것이 여간 곤란한게 아니다.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어도 '유기농'은 커녕, 엄마가 주신 밑반찬이나 김치까지 동이 나 있고, 남은 거라곤 인스턴트 식품들 뿐일 때,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은 어쩌면 휙 여행이라도 가야 하는게 아니라 씩씩하게 내가 사는 공간을 다시 아늑하게 꾸미고 내 손으로 좋은 재료가 가득한 장을 봐와서 맛있는 음식을 차리는 것일진대, 그러지도 못하면서 투덜투덜 입만 나오니 말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데는, 신이현의 문장은 별 화려한 수사 없이도 그녀가 속한 프랑스라는 복지 시스템이 잘 잡힌 나라의 두 노인네가 시부모로써 살아가는 알자스를 꽤 소박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고, 반면에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이유가 크다. 

언뜻 생각하면 나도 우리나라 저 밑에 산자락 밑에 살면서 텃밭을 가꾸는 누군가가 가족으로 있어 따박따박 때마다 놀러간다면 이런 책 한 권 낼 수 있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읽고 있는 중간에나 꿈꿔 보는 허세라는 걸 다 읽고나면 불현듯 깨닫고서 작가의 글솜씨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갑자기 이 작가의 얼굴이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아무데도 나오지 않고, 대신 어떤 이가 장정일이 쓴 아래 시를 올려놓은 것을 읽었더니 장정일 만큼이나 나도 배가 아파온다. 역시, 남 좋은 일에 배 안 아픈 사람 없는 것이구나. 이 작가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고서 산문집 가지고 이렇게 질투하고 괜시리 미안하니, 다음엔 <숨어 있기 좋은 방>이나 빌려 와 읽어야겠다.

 

<충남 당진 여자 >

장정일

어디에 갔을까 충남 당진여자

나를 범하고 나를 버린 여자

스물 세 해째 방어한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 당진여자 나는 너를 미워해야겠네

발전소 같은 정열로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그녀를 나는 미워하지 못하겠네

충남 당진여자 나의 소원은 처음 잔 여자와 결혼하는 것

평생 나의 소원은 처음 안은 여자와 평생 동안 사는 것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처음 입술 비빈 여자와 공들여 아이를 낳고

처음 입술 비빈 여자가 내 팔뚝에 안겨 주는 첫딸 이름을

지어 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 동안의 나의 소원

그러나 너는 달아나 버렸지 나는 질 나쁜 여자예요

택시를 타고 달아나 버렸지 나를 찾지 마세요

노란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렸지 빨개진 눈으로

뒤꽁무니에 달린 택시 번호라도 외워 둘 걸 그랬다

어디에 숨었니 충남 당진여자 내가 나누어 준 타액 한 점을

작은 입술에 묻힌 채 어디에 즐거워 웃음 짓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이 누울 자리는 필요 없다고

후후 웃던 충남 당진여자 어린 시절엔

발전소 근처 동네에 살았다고 깔깔대던 충남당진 여자

그래서일까 꿈속에 나타나는 당진 화력 발전소

화력기 속에 무섭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까만

여자 얼굴 충남 당진여자 얼굴 그 얼굴같이

둥근 전등 아래 나는 서 있다 후회로 우뚝 섰다

사실은 내가 바랐던 것 그녀가 달아나 주길 내심으로 원했던 것

충남 당진여자 희미한 선술집 전등 아래

파리똥이 주근깨처럼 들러붙은 전등 아래 서있다

그러면 네가 버린 게 아니고 내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내심으로 서로를 버린 건가 경우는 왜 그렇고

1960년산 우리세대의 인연은 어찌 이 모양일까

만리장성을 쌓은 충남 당진여자와의 사랑은

지저분한 한편 시가 되어 사람들의 심심거리로 떠돌고

천지간에 떠돌다가 소문은 어느 날 당진여자 솜털 보송한

귀에도 들어가서 그 당진여자 피식 웃고

다시 소문은 미래의 내 약혼녀 귀에도 들어가

그 여자 예뻤어요 어땠어요 나지막이 물어오면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충남 당진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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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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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1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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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15: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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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15: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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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3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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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9-01-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이현은 장정일의 부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 프랑스가서 도미라는 남편과 알자스의 시부모를 갖게 되었는지
어안이 벙벙합니다.그리고 숨어있기 좋은 방이란 소설보다
이 산문집이 훨씬,훨씬 낫네요.

치니 2009-01-21 10:14   좋아요 0 | URL
장정일과의 조합이 너무 널리 알려져 있던 분이라, 이렇게 멀리서 잘 살고 있는 줄은 모르는 분도 많은가봐요. 저도 지난번 파리 여행 갈 때 샀던 책을 읽고서야 알았어요.
저는 숨어있기 좋은 방이 도서관에 없기에, <내가 제일 예뻤을 때>를 대신 읽었는데,이 산문집이 훨씬, 훠얼씬 낫드라구요. ㅎㅎ
 
이제야 보이네
김창완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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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씨. 이 사람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비 온 뒤 젖은 길바닥처럼 착 가라앉고 그럼에도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워졌던 길바닥을 한순간에 깨끗이 씻어준 빗줄기에 감사하듯 잠시나마 맑아지는 내 마음이 조용히 감동에 차올랐던 기억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그렇게 희망을 준 그는 정작 자타공인 페시미스트란다. 물론 그 앞에는 '천진한'이라는 수사가 붙기는 하지만. 삶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았던 그의 입술이 휴 하고 한숨을 내뱉듯 읊조린 가사들의 아지랑이는 아직 피어오르는데, 쉰이 넘은 아이 김창완, 그는 이제야 뭔가가 보인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가 보인다고 한 것들은 아무쪼록 삶에 조금이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페시미스트로서 느껴도 괜찮을만한 '좋은' 무엇이었을 것만 같아서. 이 다행의 느낌은 (언제나 그랬듯) 내 이기심의 발로. 쉰이 넘어서도 '이제야 보이는' , 아니 어쩌면 '이제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희망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아냈으니 이제껏 가짜 옵티미스트 행세를 해 온 내게는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것이다.

누구도 시도 하지 않았던 앞선 음악을 하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능란한 배우 역할을 하면서 이제 왠간한 스타보다 더 바빠 보이는 이 50대 아저씨의 머릿속에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모종의 궁금증이 여간해서 풀리지 않았는데 이 책 한권으로 그중 거개가 풀렸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김창완씨가 말하는 자유, 김창완씨가 말하는 행복, 김창완씨가 말하는 슬픔, 김창완씨가 말하는 그놈의 '희망'이 이전에 자기계발서들 따위에서 말하는 그것과 확실하고도 아름다운 차별을 두고 있다는 점. 그래서 믿음이 가고, 믿음이 생기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나도 이 거지 같은 세상 한번 살아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는 점이다.

몸은 쉬고 있어도 마음이 수시로 오락가락 고단하고, 아직도 십대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갈피를 못잡는 나같은 덜 자란 어른들에게는 이런 희망이야말로 간절하게 갖고 싶은, 언제까지나 듬직한 삶의 지렛대가 아닐까.

문득 얼마전 티비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청춘이라는 곡은 사실 싫어해요. 그런 곡을 만든 것은, 대놓고 상업주의는 하지 않지만 실은 뭐랄까, 이렇게 하면 성공할 거라는 것을 속으로 충분히 계산해놓고 안보이는 상업주의를 한 거죠. 그걸 누구보다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해요."

그가 이토록 자기 검열을 하더라도, 대놓고든 아니든 상업주의를 했더라도(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음악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예의 그 계산조차 욕심사납게 그만이 가질 수치상 성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을 광범위하게 행복하게 할만한 무엇을 포함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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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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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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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er 2008-12-1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To..

'이 형이 부른거예요?'
아이가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서, 나도 하린군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연거퍼.. Thank To.. ^^

치니 2008-12-19 14:18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도착했군요. ^-^
아이가 들었던 감상이 아무쪼록 좋은 감상이었길 바래요.

rainer 2008-12-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법 비평가 행세를 했습니다.
제목과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고 음색과 연주를 가사내용과 비교하더군요.
아이는 동경의 눈빛이었고, 우린 무척 즐거웠습니다.
(엄마가 아는 언니 아들이야, 이랬는데.. 그게 요샛말로 '엄친아'더군요. ^^)

치니 2008-12-20 11:11   좋아요 0 | URL
하핫, 엄친아.
즐거우셨다니 덩달아 좋습니다.
어린 비평가들의 비평이 가장 정확할 때가 많더라구요.
잘하건 못하건, 즐길 수 있는 것이 음악인 하린군에게, 저도 동경을 느껴요. ^-^;;

2008-12-19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0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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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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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2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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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8-12-2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에 대해 얘기하는 것 저도 들었어요.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인데 '필요'만큼 정직한 가치도 드문 것 같아요.

치니 2008-12-30 10:47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는 예의 그 '청춘' 이야기를 한 인터뷰를 보신 분들이 꽤 있나봐요.
요즘 이 아저씨가 부쩍 많이 등장해서 티비 볼 맛이 납니다.
네, 정직한 가치...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2008-12-30 0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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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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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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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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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2009-10-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은 서두와 중간은 잔잔하다가 매번 마지막에서 내용을 정리하고 메시지를 던지시네요. ^^ 스타일이 그런가 봐요. 여운이 남긴 하지만 이런 글쓰기 패턴 때문에 살짝 지루했다는.. 하지만 전체적으론 편하게 읽었어요. 과거 남동생이 이분이 어느 신문에 게재한 글을 읽고 무지 칭찬했던 기억이 나네요.

치니 2009-10-27 13:46   좋아요 0 | URL
전문 작가는 아니기에 초큼 아쉬운 구성이 더러 드러났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글 솜씨 보다는 이 분이 가진 생각에 공감이 많이 되어서, 좋았어요.:)
 
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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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시리즈의 후반부인 제 4권. 3권 이후부터는, 이 사람의 변절 - 이런 단어가 부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느낌대로 쓰련다 - 이 슬슬 입질을 해왔다. 그리고 왠지, 그 변절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던 것은, 모르겠다, 작가로서의 재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믿고 있어서인지, 그냥 그 시대에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이 쓰고 싶은 글만 써서는 살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3,4,5권이 그런 내용들로 점철되었다 해도 그 안에 반짝이는 기지가 여전히 있었기에 큰 불만이 안 생기는 것이겠다.

5권은 꽁트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짧은 단편들의 나열인데, 개중에는 그야말로 모티브를 떠올리기만 하고 글 자체는 휙휙 써버린 것 같은 - 독자로서는 그렇게 느낀다. 김승옥씨야 나중에 어디서 인터뷰를 보니 어떤 글도 쉽게 쓴 것은 없다고 하더라만 -, 지나치게 가벼운 느낌의 글들이 많았다.

4권은 그야말로 작심하고 통속 소설을 쓰기로 한 이후의 글들이 아닌가 싶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자극한다. 그 자극이라 함은, 다름 아니라 자꾸만 주인공 흉내를 내고 싶어진다는 거다. 내가 배우도 아니고 영화에 나올 일도 (죽었다 깨난다 해도) 없을 것인데, 이 70년대 초 연애질 하는 수정이 역할이 왜 이렇게 탐나는 것이냐. 코 싸매쥐고 말하는 것 같은 예의 성우 목소리가 귀에서 왱왱 울리면서,  어서 너도 한번 해보라고 하는 것만 같은 것이다.(알라딘의 모 님도 김승옥의 책을 읽고 혼자서 일인다역을 해보았다고 했었으니, 이건 기실 나만의 똘짓은 아닌거다. 훗)

그리하여,

우리는 했다. 하하. 같은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은 친구와 나는, 책을 들고 나란히 읽었던 것이다. 나는 수정이, 친구는 명훈이.

읽다보니 힘이 들었다. 연기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그리고 읽다보니 그의 섬세한 문장력에 다시 감탄하게 되었다. 통속소설도 아무나 쓰는게 아니구나.

아이고, 역할놀이, 아무튼 재미있었다, 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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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8-12-1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무지 잼있었을거 같아요!

치니 2008-12-17 13:45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하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한 쪽 하고 포기. ㅋㅋ

니나 2008-12-1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날 놀리시구, 히잉, 나 울래요." .... "이거봐 수정이" ㅋㅋㅋㅋㅋ오늘 만난 친구한테 제가 저번에 김승옥을 전염시켰거든요. 바로 저한테 강변부인을 상납하더군요. 퇴근길이 또 신났어요~ 냐하하 :)

치니 2008-12-18 12:37   좋아요 0 | URL
히잉 , 요부분이 바로 콧소리를 절묘하게 내야 하는 건데...어렵더라구요.ㅋㅋ
니나님은 연극 경험이 많으셔서 더 잘하실 거 같은데, 아흐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2008-12-18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