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첫인상이 시시했음에도 다시 읽기 시작한 건, 처음엔 그저 장난스러운 마음이었어, 그러다가 점점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어. 처음엔 재미 삼아,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돌덩이 하나를 자기 동굴의 입구에서 굴리다가, 그 돌덩이가 동굴을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공기를 차단시키자, 질식된 듯 겁에 질려 놀라운 집중력으로 그 돌을 치우려고 기를 쓰는 사람 같은 기분. 그런데 그 돌은 이제 열 배는 무거워졌고, 그 사람은 공포에 질려 온 힘을 끌어모아야 해, 다시 빛과 공기 속으로 나오기 위해서 말이지. 그래서 나는 이런 날들을 보내는 동안 펜을 손에 쥘 수가 없었어. 빈틈없이 다시, 또다시 더 높은 곳으로 치솟아, 자기가 가진 망원경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높이 올라간 어떤 삶을 조망할 때면, 의식은 진정되지 못하는 법이잖아. 하지만 그런 의식이 커다란 상처를 받는 것은 다행이기도 해. 그것을 통해 의식은 그 어떤 물림에도 반응할 만큼 예민해질 테니까. 나는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다만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할까? 네가 편지에 쓰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맙소사, 만약 우리에게 책이 아예 없다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는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그런 책들은, 필요하다면 우리 모두 각자 쓸 수도 있을 거야. 우리에게는 마치 불행처럼 다가오는 책들이 필요해,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한 어떤 이의 죽음 같은 불행, 모두가 사라져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 남겨진 불행, 말하자면 스스로 삶을 끝내야 할 것 같은 불행 말이야.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돌연한 출발>, 프란츠 카프카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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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통해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소설을 쓰는 고통 정도는 웃으면서 이겨낼 수 있게 됐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삶의 수많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 기쁨은 정말 뜻하지 않은 것이어서 마치 길을 가다가 큰돈을 줍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사전에는 활수(滑手)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시원스럽게 잘 쓰는 씀씀이”라고 나와 있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활수 좋게 산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된다.


유행가의 교훈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물론 더 좋은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아무튼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자. 그게 바로 평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물론 가장 좋은 삶이라는 건 매 순간 바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산다면, 옛날에 좋아하던 유행가를 들을 때처럼 특정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경험들을 많이 할 것이다.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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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락 - 문예 세계문학선 119 문예 세계문학선 119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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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자기객관화와 자조 사이, 격변의 시대에 세대를 관통하는 작가 본인의 정체성 또는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 와중에 이토록 유려하고 천재적인 글솜씨라니! 과연 까뮈는 까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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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내가 애국자라는 걸 알게 되었던 거예요. 웃으시는군요. 웃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샤틀레 지하철역에서였습니다. 개 한 마리가 그 미로에서 헤매고 있더군요. 큼직하고 거친 털에 한쪽 귀가 찌부러진 그 개는 재미있어 보이는 눈초리로 껑충껑충 지나가는 사람의 정강이를 따라다니며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개를 여간 좋아한 게 아니었습니다. 개는 언제나 용서해주니까요. 나는 그 개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녀석은 반가운 듯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내게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와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때 걸음걸이가 활발한 젊은 독일 병사가 내 옆으로 지나쳐 개 앞에 이르더니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개는 서슴지 않고 여전히 기쁜 낯으로 그 병사의 뒤를 따라서 그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원통한 심정과 그 독일인 병사에게 느낀 내 분노의 종류로 보아, 그것이 애국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만약에 그 개가 어느 프랑스 사람을 따라갔더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상냥스러운 개가 어느 독일 연대의 마스코트가 된 광경을 상상했고, 그러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반응 검사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일은, 물을 마실 적에 나는 어차피 죽게 될 사람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더 필요하며,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내 생각을 합리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국이며 교회는 죽음의 태양 밑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나는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소유한다는 걸 좀 부끄럽게 여겼지요. 사교계에서 잡담을 하다가도 “여러분, 재산이란 살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하고 외친 적이 있답니다. 재산을 돈 없는 훌륭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만한 아량이 없어서, 있을지도 모르는 도적의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두는 셈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우연이 부정을 고쳐주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심판을 회피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가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선 단죄(斷罪)를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벌써 단죄가 좀 희미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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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겁나니?”


  “조금요.”


  “좋은 일이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때도 두려워하는 편이 좋아.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거든.”


고모가 나를 확 밀어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모의 온기가 사라지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꾹 참았다. 고모가 엔초와 춤을 춘 후로 그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고모가 그녀의 다시없을 유일한 사랑에 대한 모든 기억을 세세하게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와 함께 춤을 추면서 그 순간을 다시 되새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나도 빨리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말이다. 엔초에 대한 추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고모의 깡마른 몸과 가슴과 숨결에서 사랑이 조금 새어 나와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 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굴어.


가끔 우리가 하는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상징일 수도 있거든. 


“기도가 도움이 됐니?”


  “아니요.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 마술과 같아요.”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 강요에 복종하면 마음도 복잡해지고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된단다.”


  “그럼 복종이란 피부병과 같은 것인가요?”


사랑이란 뒷간 문에 달린 유리처럼 탁한 거란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 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요. 마실 것을 드릴 테니 편히 계세요. 볼륨을 좀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든 검은 베일이 드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눈이 멀어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부딪힐 수 있다. 어떠한 한계를 넘어가면 모든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만 그러는 걸까. 인간의 본모습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증오나 사랑처럼 농도가 짙고 무거운 감정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드러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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