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당연히 할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내가 착해서 그런 거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쯤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연말에 몇몇 단체에서 소득공제영수증을 보내줄 때면 누가 좀 봐줬으면 싶을 만큼 되게 뿌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다. 고작 돈 만원씩 이만원씩 내는 걸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월급이 늘면 돈도 더 낼 수 있다. 물론 그걸로 임무를 다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돈을 내고 먹는데 저는 안 내고 먹으니까, 많이 먹으려면 눈치 보여요."라는 아이의 말을 듣고 어떻게 죄책감을 피할 수 있겠나. <PD 수첩>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졌다.

가관이었다.
김상곤 교육감(내가 뽑았다)의 '무상급식' 안을 두고 면전에서 '혹세무민'이라 흥분(발광)하고
이 공약이 '일장춘몽'이 될 거라고 연설하는 인간들을 보는데(아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침착하려 애쓰는 김상곤 교육감을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경기도의 전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주겠다는 기획에 대해(경기도가 처음도 아니다) 이를 악 물고 반대하는 족속들은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 애들을 굶긴다는 건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가난은 오로지 개인의 책임인 것이다. 게으르고 무능한 탓인 거다.
'돈 많은 집 애들에게 혜택을 줄 돈으로 더 가난한 애들을 찾아 돕는다'
얼핏 들으면 개중에 말이 되는 것 같은 소리다.
그들에게 가난은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베풀어 도와줄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국가에 바라는 건, 불우이웃 돕기가 아니라 제도적인 개선인 걸
그들은 죽는 순간에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근데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도 내가 너무 근사하게 풀이해주는 것 같다.
'돈 많은 집 애들에게 혜택을 줄 돈으로 더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서' 라고?
당신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피가 돌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소릴 '당신들' 입에 담나.
언제부터 너희가 부자에게 가는 혜택에 목놓아 반대하고 '더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왔나.
어떻게 인간의 입이 그렇게까지 더러울 수 있나.
그 입도 밥을 먹는 입인가.

일부 아이들 급식비가 밀리면 결과적으로 전체 급식 운영비가 줄어서 갈비탕 나갈 게 콩나물국 나가게 되어 결국 아이들 모두가 손해라며 영양사 교사가 한숨을 쉬었다. 기껏해야 6학년일 아이들이 무상급식을 하면 부모님한테 부담도 덜 되어 좋겠다며 웃는다. 부끄럽고 분해서 잠을 설쳤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결국 믿을 만한 단체에 결식 아동 돕는 기부를 알려달라고 문의를 넣고 있자니 눈물이 솟는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기부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국가를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다.
나는 화가 나서 누군가를 돕고 싶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착한 일을 하고 뿌듯해하는 속물로 살고 싶다.

밥 먹는 일의 존엄함도, '제도'란 무엇인지도, '국가' '세금'이 무슨 뜻인지도
저 더러운 입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일 것 같다.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부잣집 애들이 혜택을 받아도 괜찮으니까 애들 밥 좀 먹이자.
차라리 돈이 없어 그러니 특별 세금을 걷겠다고 하면 그래, 내겠다.
내 돈으로 부잣집 애들 밥 먹여도 괜찮다.
다 똑같은 애들이고 똑같은 입이다.
부잣집 애들 먹는 밥은 아깝고, 가난한 집 애들 먹는 밥은 소중하다고 생각 안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9-07-2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 파르르르, 불끈이에요..ㅜ.ㅜ

네꼬 2009-07-30 08:57   좋아요 0 | URL
방송 보면서 눈물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래서 '빡 돈다'는 말이 있나봐요.

도넛공주 2009-07-2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니 그래서 어찌된거랍니까?주기로 했답니까 말기로 했답니까? 이것들을 그냥.............

네꼬 2009-07-30 08:58   좋아요 0 | URL
예산안을 일차로는 50% 삭감, 이차로는 100% 삭감했대요. 무산된 거죠. 교육감은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 하는데 저들도 만만치 않아요.

다락방 2009-07-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추천 말고는 할말이 없어요, 정말!! ㅜㅜ

네꼬 2009-07-30 08:59   좋아요 0 | URL
아아, 다락님아. 우리는 정말 '밥'의 소중함을 정말 정말 알잖아요. ㅠㅠ

paviana 2009-07-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먹으면 눈치 보인다니....정말 얼굴을 들수가 없네요.

네꼬 2009-07-30 09:00   좋아요 0 | URL
'애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눈치 보는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아이들 중에는 꿈이 요리사인 애도 있었어요. 잘 배워서, 배고픈 아이들한테 밥을 나눠주고 싶대요. 세상에.

웽스북스 2009-07-3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너무 속상해요. 흑.

네꼬 2009-07-30 09:01   좋아요 0 | URL
이럴 땐 일단 서로 안고 울어야 돼. 너무 속상해요. 정말 너무 속상해.

무해한모리군 2009-07-30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새끼들 입에 제대로된 밥 한술 떠먹이겠다데도 이래저래 말 많은 저 주둥이들..
제가 이래서 욕을 끊을수가 없다니까요..

네꼬 2009-07-30 09:02   좋아요 0 | URL
김상곤 교육감과 일하는 분 인터뷰를 보니 '다른 건 다 깎아도 된다. 다 못하게 해도 된다. 애들 밥 주는 일만은 통과시키자'고 그렇게 애를 썼대요. 방송 보면서는 기가 차서 욕도 안 나오더라고요.

치니 2009-07-3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화요일 PD수첩 하는 줄 알았는데도 이상하게 티비 켜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만, 이런 주제였어서 그랬나봐요. 그날 봤으면 어땠을까, 지금 이 글을 읽는데도 심장이 막 쿵쾅거리는데, 그런데 이렇게 눈 닫고 귀 막는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자꾸 더 힘들어지는거겠죠.
네꼬님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네꼬 2009-07-30 10:36   좋아요 0 | URL
저도 무척 피곤한 날이었는데, 게다가 이 리포트 전에는 미디어법 날치기 한 국회의 전자투표 리포트였는데... 맘 단단히 먹고 보았어요. 사실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들의 연속이더라고요. 누구 말대로,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약이 올라 건강이 악화되고, 안 보면 방치하는 셈이 되니 매일매일 갈등입니다. 에서 뭔가 다른 걸 보고 싶어요. 뭔가 다른 걸.

Arch 2009-07-3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네꼬 2009-07-30 10:36   좋아요 0 | URL
Arch님, 느는 게 정말 한숨과 욕 뿐인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09-07-3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흥분을 넘어서 분노에 찬 울분이 섞인 페이퍼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인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국가 보조금으로 도시락 지급되는 내용 때문에 불을 뿜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도시락이 쓰레기였었죠. 관활구청에선 예산이 적어 어쩔 수 없다..지만 같은 가격에 한솥 도시락같은 곳에선 가격대비 성능 뛰어난 도시락이 분명 존재하는데 무사안일하고 중간에서 그 돈마저 빼먹는 공직자들의 부정부폐로 일어난 사단이었죠.

제가 사는 동네 생태탕 끝내주는 집도 특선으로 물메기탕이 나오는데 가격이 제법 쎕니다 1인분 만원이 넘어가니까요. 근데 그 물메기가 점심시간에 바로 동이 난답니다. 인근 구청 공무원들이 싹쓸이 한다지요. 아이러니 하죠.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아이들 급식으로 돈이 매일 빠져나가는데 그 돈으로 월급을 받는 인간들은 한 끼 만원이 넘는 식사를 호기롭게 지불하니까요.

네꼬 2009-07-31 09:47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는, '꿈나무 카드'라는 결식 아동들 식사 카드의 문제가 제기 되었지요. 현실적으로 그 카드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분식, 샌드위치, 우유 정도라고요. 그냥 한 끼 때우라는 식,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은 고사하고 영양을 생각한 음식도 먹을 수 없게 하는 나쁜 행정. 방학을 했으니 그 아이들은 그게 거의 유일한 식사일 텐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억장이 무너집니다.

아이들 점심 급식비는 한 끼에 1700원 정도 된대요. 한 달 급식비는 일인당 35000원 쯤 되고요. 그 공무원들 서넛이 몰려가 먹는 식사 한 끼가 아이들 한 달 급식비네요. 세상에 어디부터 손을 대야 될까요.

조선인 2009-07-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이 하늘이고, 백성이 하늘인데, 그걸 왜들 모를까요. 정말이지 아가리를 찢어죽일...

네꼬 2009-07-31 09:56   좋아요 0 | URL
없던 분노를 만들어요. 없던 적개심을 만들어요. 안 하던 욕을 하게 하고요. 밥 먹다 말고도 씻다 말고도 저치들이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나요.

세실 2009-08-0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가 보일수도 있겠군요. 에휴 속상해라.....
엉뚱한 이야기지만 그 가난이 우리들 책임일텐데 말입니다. 게으르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무책임한 부모들 땜에 가난이 늘어나는거 같아요.(이혼후 아이를 할머니가 키우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는 듯. ㅠㅠ)

네꼬 2009-08-05 17:07   좋아요 0 | URL
자꾸만 울 일이 생겨요. '배고픈 아이들'이란 말은 언제쯤 옛날 말이 될까요.

2009-08-02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4-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거 꾹 추천!...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저러면 안되는거예요!!! 경기도에 호화청사까정 지어요....미쳤어 정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