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서재를 만들면서 마음 먹기를, 책에 관해서는 좋은 얘기만 하자는 것이었다. 남이 열심히 쓰고 만든 책에 대해 나쁘게 말할 깜냥도 안 된다. 어떻게 만든 책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말로 작가와 편집자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비판적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분들은 많이 있으니까. 나는 적어도 책에 관한 한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화가 나서 한마디 해야겠다. '어린이 자기계발서' 카테고리에서 이런 책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표지를 내 서재에 올려놓기도 싫다)
제목
서울대를 꿈꾸는 소년 소녀가 알아야 할- 초등학생 때 공부해야 하는 17가지 이유 & 과목별 공부 이유와 공부 방법
목차
제 1 장 초등학생 때 공부해야 하는 이유
1. 중.고등학교 공부쯤은 문제없게 돼
2. 외모보다 더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
3. 아이스크림 고르듯 대학을 골라갈 수 있어
4.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할 수 있어.
5. 세 번의 기회를 모두 잡을 수 있어.
6. 아는 게 많으면 정말 먹고 싶은 것도 많아져
7. 많은 사람들이 너를 기억할 수 있게 돼
8.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어
9.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어
10. 남보다 좋은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어
11. 좋은 성적표 말고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어
12. 실패할 확률이 적어져
13.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아져
14.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
15. 가만히 앉아서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어
16. 쓰면 쓸수록 더 좋아지는 머리
17. 내가 나라의 힘을 키울 수 있어
제 2 장 과목별 공부 이유와 공부 방법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외모보다 괜찮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더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해서, 외국에 나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다. 공부를 잘 하면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거다. 공부를 못하면 당연히 그 반대겠지. 평가가 나빠지고 사람들에게 잊히고 가난해지고 외국에 못 나가고 가족이 불행해진다는 것이겠지. 공부를 잘하면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단다. 반대로 공부를 못하는 어린이는 당당할 수도, 자신만만할 수도 없다는 거 아냐. 이걸 말이라고 한다. 이걸 책이라고 냈다. 심지어 거의 똑같은 제목과 표지의 책이 2006년에도 나온바 있다. 잘하는 일이라고 새로 내기까지 한 것이다. 쓰고 만드는 노고와 별개의 문제로, 세상에는 만들어선 안 되는 책도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어린이책은.
표지를 보니, 이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명의 어린이라도 이 책을 볼 것이 두렵다. 아니 단 한 명의 어른이라도 이 책을 볼 것이 두렵다. 아니 이 목록을 작성하고 앉아있었을 어른들이 무섭다. 이런 책이 나오고 있는 세상이 무섭다. 얄팍한 기획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런 책이 나오는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읽지도 않은 (그럴 리도 없는) 이 책에 대해 굳이 이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제발 "어린이 자기계발서"라는 카테고리의 책을 고르는 어른들이, 정말이지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에서다. 나는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놀기만 하고 공부는 안하는 자녀를 둔 갑갑한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혀가면서 공부를 시키고 싶은 부모도 있는 것일까? 샤방샤방한 만화 주인공을 표지에 그려놓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꾸며서 이걸, 애들한테 주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어른들 사라고 이런 책을 내는 걸까? 이게 정말 '자기계발'일까? 늘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해던 말을 오늘은 해야겠다. 모든 '어린이 자기계발서'가 이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기계발서'가 어린이에게 정말 필요할까? 어린이에게 유익하고도 유일한 자기계발은 이따위 책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