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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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드러내며 경종을 울리는 메세지를 던진다!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 뽑힌 『카지노 베이비』의 강성봉 작가는 소설 속 화자를 통해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 특히 돈에 대한 욕망이 헛된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욕망의 분출구로 묘사된 장소는 합법적으로 도박을 할 수 있는 장소인 '카지노'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도박을 위해 끝없이 돈을 건다. 아니 자신의 생명을 도박 기계에 갈아 넣는다. 심지어 도박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갓 태어난 베이비도 포기한다. 돈을 위해. 생명 경시 현상이다. 『카지노 베이비』 처럼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소설 중에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에서도 불법 장기 매매, 카지노에 중독되어 빈털털이가 되는 사람들의 초로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소설 속 사건은 마냥 지어낸 일들만이 아니다. 작가가 구상해 낸 소설 속 인물도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 아닌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돈이면 다 좋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카지노 근처에는 즐비하게 전당포가 자리잡고 있다. 카지노가 돈 먹는 하마라면 전당포도 만만치 않다. 도박에서 돈을 잃기 시작하면 본전 생각이 나나보다. 도박에서 손을 떼기위한 가장 최초의 지점이 아닐까 싶다. 본전 생각에 돈이 되는 물건이면 죄다 모아 전당포에 가지고 간다. 전당포 거리는 이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카지노와 전당포는 물고 물리는 관계다. 뻔히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할 전당포 주인도 이성을 잃고 온통 도박에 빠져 물건을 맡기려 오는 이들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보기 때문에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으로 본다면 측은한 마음이 한 켠에 들지 않을까. 

 

카지노 베이비로 전당포에 맡겨진 소설 속 화자 '동하늘'. 꽤 생각이 깊다. 진짜 엄마도, 아빠도 모르는 아이다. 카지노 호텔에서 내 던져 졌으니 말이다. 아빠의 성도 엄마의 성도 아닌 전당포 주인의 성을 물려 맡은 가련한 아이 '동하늘'. 학교 갈 나이가 되었음에도 학교 대신 할머니라 부르는 이의 전당포 가게에서 세상에서 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귀동냥으로 배운다. 작가는 '동하늘'을 통해 비운의 삶을 살아야했던 할머니의 과거를 소환하며 굴곡진 탄광 지역의 현대사를 끄집어 낸다. 

 

할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동하늘'의 고조할아버지뻘이라고 해야 되나. 동해 바닷가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할머니의 아버지는 느닷없이 동네에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보아야했던 전당포 할머니. 어찌어찌 도망치다시피 쫓겨나온 카지노 마을, 지음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탄광에서 일을 했던 할머니의 남편은 사북탄광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며 과부로 다방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시대의 변화 흐름 속에서 지음 마을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업종을 전당포로 바꾼다. 전당포 할머니가 살아온 삶은 어찌보면 한 많은 현대사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슬픔의 인생사가 아닐까 싶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 산업의 지형이 바뀌고 마을의 형태도 한 순간에 '카지노'라는 합법적 도박 장소로 지정된 마을의 변화를 보며 오랫동안 살아왔던 주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전당포 할머니처럼 자신의 자식(삼촌)도 도박 중독증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물건 대신 베이비를 맡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 딸 자식(작품 속에는 동하늘의 엄마로 등장)의 암울한 미래 등등은 자신이 지음 마을을 선택하긴 했지만 그 마을이 도박 장소로 바뀔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단지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동의 절차를 허술하게 거치고 마을의 발전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도장을 찍어 준 몇 몇 이들의 횡포로 평범한 마음 사람들은 무너져 내리는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만 보아야했다. 

 

작가는 돈이 사람을 망가뜨리고 마을을 파괴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뒤에서야 돈의 악의적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늦은 후회였지만 뒤늦게라도 깨닫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http://blog.naver.com/bookwoods/222822616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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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예리한 시각과 탄탄한 짜임새로 원작을 유려하게 풀어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조종상 옮김 / 도서출판소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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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는 언제나 후회되지 않는 선택이다. 단지 고전 읽기를 주저할 뿐이다. 고전은 깊은 우물과도 같다. 한 번 길어 마시기가 어렵지 갈증을 해갈하기에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살다보면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승승장구하다보면 나 잘난 맛에 취해 자칫 교만하기 쉬워진다. 교만함은 다른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자기만 옳은 줄 알고 설쳐대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교만의 늪을 빠져 나오는 방법 중에 하나는 고난을 만나는 것이다. 아니 고난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당장은 속이 쓰리고 힘에 겨워 지쳐 지낼 수 밖에 없지만 나중을 돌아보면 차라리 고난을 만난 것이 복이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노인과 바다>는 젊은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청년들이 읽어야 하고 자신의 인생 속에서 정상에 올라간 이들이 필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85' 라는 숫자는 괜히 써 있는 숫자가 아니다. 한 때는 팔씨름 대회에서 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팔 힘을 가졌던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조금만 무리하더라도 손에 쥐가 날 정도의 노약한 노인이 그가 85일간 아무런 소득 없이 바다에 나갔다가 힘없이 돌아온 날을 말한다. 만선을 꿈꾸며 나갔지만 85일 동안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젊었을 때는 원양 어선을 타기도 했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고기도 많이 잡아본 경험이 많은 그였지만 세월은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멀리 나간 그날 바로 기적이 찾아온다. 생각지도 못한 덩치 큰 물고기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피 냄새를 맡은 상어떼의 공격으로 앙상한 물고기 뼈만 매단 체 항구로 돌아온다. 우리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3월 새학기를 맞이하는 어느 날 나도 만선을 꿈꾸며 돛을 띄울 계획이었다. 작년에 한 해 정도 살아봤으니 올 해에는 비교적 축적된 경험으로 자신감 있게 헤쳐 나갈 꿈을 간직했다. 차곡차곡 계획한 일들이 진행되고 왠지 술술 잘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까지는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어찌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야말로 마음 속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쿵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치울 수 없을 만큼의 근심의 돌덩어리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인다. 결국 실수가 만회되도록, 만에 하나의 극단의 결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할 뿐이다. 사람은 늘 실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완벽한 것 같지만 늘 허술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고기 뼈만 앙상하게 매달고 돌아온 노인의 심정도 이와같이 않았을까? 마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할꺼며 사흘간 사투를 벌인 결과가 고작 상처난 자신의 몸뚱아리 뿐이니. 그러나 유일하게 노인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청년 마놀린이다. 내가 꼬인 일때문에 혼자 동굴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낚시 줄을 던져 건져내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아내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준다. 소심한 나를 다시 일으켜 준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상어와 사투를 벌인 노인을 걱정하고 일으켜세워주는 청년 마놀린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생이 바다라면 우리는 '노인'과도 같다. 바다는 고요한 것 같지만 잔인한 상어가 늘 존재한다. 노인처럼 백전노장이라도 어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 자책하지 않기를. 실수가 실패가 아님을. 

 

https://blog.naver.com/bookwoods/222608299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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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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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팬데믹을 가상하여 쓴 소설이다. 이름하여 '선 열병' 

 

"선이디오이데스라는 균이 선전 지역에서 생겨난 이후 중국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중략) 선 열병은 중국 내 경제특구인 제조업 밀집 지역의 공장에서 우연히 변종을 일으킨 진균 포자가 온갖 화학 물질이 과하게 뒤섞인 혼합물을 통해 증식한 결과였다" (342쪽)

 

소설의 중심 무대는 미국 뉴욕이다. 인구가 대다수 밀집 되어 있는 거대한 도시 뉴욕을 배경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균이 사람들에게 침투하여 이성을 잃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주인공 캔디스 첸은 이민자 2세다. 성경을 판매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중국과 홍콩 등지를 오고가며 성경이 잘 인쇄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본사는 당연히 미국 뉴욕에 있다. 소설의 스토리 전개는 중첩되어 진행된다. 선 열병에 감염되어 살아남은 소수의 미국인들이 마지막까지 생존하기 위해 이쪽 저쪽을 옮겨다니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 열병이 감염되기 전의 장면들을 주인공 캔디스 첸의 발걸음에 따라 이야기가 소개된다. 감염병이 창궐하여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면과 감염병이 막 시작되었을 때 반신반의하며 일상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장면들이 번갈아 가면서 소개된다. 

 

가상 상황을 전제로 씌여진 소설이긴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팬데믹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아직도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계열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2년 넘게 아니 앞으로 3~4년 정도까지 거뜬히 지속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비추어 볼 때 감염병은 이제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피부로 와 닿는 관심사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과거에 있었던 흑사병, 콜레라, 독감, 사스가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며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소설 속 가상의 감염병인 '선 열병' 조차도 그저 상상 속의 질병이 아닐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피난가지 않고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목숨의 위태로움을 미리 깨닫고 가족들과 함께 일치감치 안전 지대로 옮기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대도시가 서서히 죽음의 도시로 탈바꿈하고 이성을 잃은 걸어다니는 시체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볼 때 섬뜩함을 넘어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게 된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패션의 일번지이라 원활한 경제 중심지였던 뉴욕이 약탈의 중심지가 되고 폐허가 되리라고는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감염병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눈에 보여지는 전쟁보다 보여지지 않는 감염병이 더 무서운 세상이다. 

 

감염병을 이슈로 다른 소설이지만 내게는 또 한 가지 소재가 눈에 들어왔다.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 속에 불공정한 과정들이 개입되고 있는 상황을 그려낸 부분이다. 

 

"우리가 당신네 나라의 유럽-미국 기독교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상징적인 텍스트를 제작하고 있는데 당신네와 당신네 고객들은 이 일에, 이 중요한 과업에 드는 제조 단가를 한 푼이라도 줄이려고 공격적으로 협상을 하고 있고, 인쇄 건마다 납품은 재촉하면서 인건비는 매년 삭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40쪽)

 

작가는 어떤 의도에서 이런 부분들을 소재로 가져 왔을까? 공정무역에 관한 부분이다.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인건비가 제대로 책정되고 있지 않는 부분, 제조 단가를 줄여 이익을 챙기려는 부분,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인건비를 삭감하는 부분들이 읽는 내내 불편했다. 물건 값이 무조건 싸다고 해서 좋은 것 아닌 것 같다.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는 물건을 만드는 데 소모된 인건비를 제대로 보상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인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마저 선 열병에 감염되었다. 공장을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성경 인쇄도 중단되었다. 이처럼 감염병은 최악의 경우 모든 경제를 올스톱할 수 있음은 엿볼 수 있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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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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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아이의 눈으로 그려낸 인도 슬럼가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들의 이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훈훈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강자에겐 약하게, 약자에겐 특히 강하게 구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이들을 통해 이기심 가득한 인간의 내면을 다시 보게 된다.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에서 나오는 빈민가의 소년들을 보며 팬데믹 상황 속에서 시름하는 우리들의 이웃들이 오버랩된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르신들, 장기간 기저질환을 앓고 있는 사회 밑바닥에 있는 약자들,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닭장처럼 비좁은 곳에 근무하는 콜센터 직원들. 지금의 펜데믹이 백신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수 많은 돌연변이가 실시간 나타나고 있고, 수십 년 전 죽지 않고 잠들어 있든 숨어 있든 잠자코 있던 바이러스들이 또 다시 활동을 재개할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에서 저자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이웃이 되어야 함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던지고 있다. 

 

자기보다 약하고 종교가 다른 이웃을 범인으로 몰아가며 배쳑하는 동네 사람들의 이기심이 마음 한 구석에 아픔으로 다가온다. 진정한 종교는 우리가 세우는 모든 인종적, 성적, 사회적 벽을 끊임없이 허물고, 수많은 분열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내야 한다. 으신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일체의 차별이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종교의 이기심을 낱낱히 보여주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참고로 <열두 예언자의 영성>의 일부분(65쪽)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통하여 형성한 하나님과의 공동체 의식은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 의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정의와 공의의 척도는

그 사회의 약자가 얼마나 배려받고 보호되고 있는지 달려 있다.

 

한 교회의 정의와 공의의 척도는

그 교회의 약자가 얼마나 배려받고 보호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한 개인의 정의와 공의의 척도는

그 사람이 약자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보호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린이 실종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분명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빈민가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라져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다고 한다. 아이들을 납치해 간 범인들은 돈을 받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밀매를 위한 의도된 계획으로 몸쓸 짓을 행한다. 아이들을 다시 되찾고 싶어도 그들에게는 돈이 없기에 쓰라린 아픔으로 평생을 지내야 한다. 인도 사회에 만연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이 소설은 인도를 넘어 제3세계의 모습도 연상케 한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북측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미 중국 국경너머로 팔려가는 북측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우리 사회의 인신매매에 대한 경종을 울리게 한다. 

 

안타까운 사연들로 가득한 인도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교에 근무하는 1인으로 남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 사회는 이윤 추구의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현대판 신분제로 불리우는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생산된다는 점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삶의 부익부 빈익빈이 갈수록 태산이 되는 세상 속에 어른인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결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과연 아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렇게 말하는 어른은 진심을 다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희망 사항을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하는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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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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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도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만나보았으면.....

 

주인공 허남현은 굴착기 기사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 두 번째 아내와 살고 있다.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두었다. 67세 노년이 나이에 접어둔 남현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았났을 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기록한 <청년일지> 노트를 서재에서 찾아낸다. 거기에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도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 하나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이를 찾는 일이고 보연이에게 아빠 노릇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다. 남현은 수소문 끝에 보연이를 찾는다. 그리고 보연이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 보고 있지만 남현이에게는 딸 보연이가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연이는 잃은 아빠를 늦게나마 찾게 되고 서로가 용서를 하게 된다.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한부모 가정이 제법 많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그렇겠지만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고스란히 상실의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도움이 더욱 필요한 때가 있을텐데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든다. 행여나 상처가 곪아 터져 삐뚤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아빠와 엄마가 있는 가정에서도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은데 한 부모 그늘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아이의 장래가 눈에 밟히기도 한다. 내가 그런 삶이 살았기에 피부로 더 와 닿나보다.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그 설움을 잘 안다. 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나, 단 둘이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금기어였다. 나 스스로도 아버지가 누군지 간절하게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 같아 깨끗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으며 잊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생각난다. 왜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지금도 살아계실까? 만약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남현처럼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나도 제법 나이가 들었다. 이제 곧 있으면 50이니 말이다. 혈기 왕성할 때야 우리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존재가 불편하고 원망가득하겠지만 반백 인생을 맞이하는 지금에서야 만약 나타난다면 보연이처럼 처음에는 당황스럽겠지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가정을 꾸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자녀들도 장성하여 손주까지 보고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겠다. 허남현의 두 번째 가정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남편에게 전 처 소생의 딸이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 준다. 허남현의 또 다른 딸 선아도 다른 엄마의 딸, 언니가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넉넉히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왕 이렇게 살아왔는데 왜 우리 가족을 버렸냐고, 나를 찾지 않았냐고 따질 수 있겠는가. 그저 생명을 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늦게나마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이 모든 가정사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가정사가 있었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바라고 지켜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말못할 아픔과 상처가 있지 않을까? 다만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기에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을 뿐.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사람이 수두둑 할 것 같다. COVID-19를 신호탄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각퍅해 지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줄 모르기에 만남을 꺼려하고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더더욱 대화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서로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굴착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인간미가 묻어 있는 늙다리 청년에게 마음을 준다. 약삭빠른 젊은이보다 무디지만 진솔한 청년에게 자신의 굴착기를 넘기려 한다. 공감해 주는 사람,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다. 설령 사회적 지탄을 받을 짓을 한 사람이라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과정이 필요한 시기다. 누가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 허남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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