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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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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죽음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방법은 무엇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교사의 존재의 이유를 깨닫는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3년 간 강제 수용된 청년 빅터 프랭클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는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책임감과 함께 사랑과 시련이라고 말한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 학파를 만든 것은 책상 앞에서 연구한 이론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가 직접 수용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로고테라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확률은 증언자들의 고백과 얼마 남지 않은 문헌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20명 꼴로 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지위, 재산, 학력, 경력은 누더기보다도 못한 것이다. 한 줌의 빵을 얻기 위해 가혹한 형벌을 받는 동료들을 무시해야 했으며 시체 더미를 두고서도 썩은 감자를 쥐기 위해 손을 뻗어야 했던 무감각한 존재가 수용소 안의 죄수들이다. 가스실로 가지 않기 위해 말끔한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죄수들의 특성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버리는 일이다. 담배 한 개피는 멀건 수프지만 굶주린 배를 달랠 수 있는 수단이다.

 

수용소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강제 노동, 학대, 굶주림, 정신적 착락, 전염병, 모멸감 등 수 많은 악조건을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수용소에 처음 갖힌 이들은 '충격'에 휩싸인다고한다. 그후 무감각해지고 혹여나 수용소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더라도 한 동안 몸과 정신이 자유에 익숙해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 아내 모두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냈고 죽었든 살았든 소식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을 불러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또 한가지, 시련(고통)을 삶의 의미로 찾아냈다는 일이 놀랍다. 각종 시련 속에서 생명을 확인했고 하루하루 시련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지로 불태웠다고 한다. 가스실로 가지 않았음을, 고열로 시름시름 앓았지만 운 좋게도 지독한 작업반에서 열외된 것을 감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고 한다.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 이유는 불행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고테라피 정신요법 학파는 환자들을 만나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준다. 환자들이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자신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역질문법이다. 아내를 잃어버린 한 남편이 괴로워하며 상담을 요청해 왔을 때 역으로 질문한다. 만약, 당신이 죽고 아내가 살아 남아 있었다면 아내의 고통을 어떻게 할 거냐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점을 환자의 내면에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책임감있게 살아갈 질문을 던지면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도 간혹 살아가면서 권태를 느끼거나 자유로움 속에서도 힘듦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접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퇴직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직 후 금방 늙는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 지나가버린 젊음을 부러워한다. 부러워하는 것은 지는 거다! 늙어가는 것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 정신요법에서 말하는 상담 기법이다. 적절한 긴장은 오히려 삶 속에서 활기가 된다고 한다. 정신적 긴장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거다.

 

교사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학생들이 있기에 교사가 존재한다.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병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4월 개학이 현실화되었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내가 교사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이 없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 미워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학생들, 학생들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학부모와의 적절한 긴장은 나를 교사로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교사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준다. 바쁠 때 짬을 내어 쉬는 쉼이 꿀맛같은 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함께 북작거리면서 살아갈 때 퇴근 뒤의 쉼이 진정한 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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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 이야기로 본 예수와 그의 시대 비아 제안들 시리즈
게르트 타이센 지음, 이진경 옮김 / 비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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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적 구도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로마 제국의 속국이지만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 받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되어 점령되고 있었다. 가장 큰 핫이슈로 유대인들의 관심을 끈 지역은 성전이 위치에 있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사마리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빌라도 지방장관이 행정 주책임자로 로마 황제의 분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빌라도는 교활한 여우로 통했다. 교묘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기 위한 정책들을 집행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예루살렘 지역의 관개시설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키 위해 성전세를 동의없이 사용하고자 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는 자존심처럼 지켜지는 세금이었다. 이방인들이 머무는 지역에 수도 시설을 개선하는 일에 쓰여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빌라도는 로마에 머무는 황제에게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충성을 다해야 했다. 로마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눈뜨고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군사적인 행동을 취해서라도 저항 세력들의 싹을 없애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반정부군처럼 행동하는 열심당원 젤롯당원들이 목숨을 건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간담을 서슬케 만든 의열단 단원의 행동과 비견될 정도였다. 저자는 '바라빠(바라바)'를 열심당원의 행동책으로 등장시킨다.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려는 극단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지배하는 유대사마리아지역 외에 갈릴래아 지역은 유대인과 같은 동족이면서 친로마적인 성향의 귀족층인 안티파스가 지방자치단체장처럼 군림하고 있다. 호시탐탐 빌라도를 견제하며 로마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한 충성경쟁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안티파스는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수를 두며 세례 요한을 참수한다. 정치적 위기에 놓이면서 거듭 악수를 둔다. 빌라도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갈릴래아 사람인 예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하수인인 '세리'로 부터 세금 착취를 당하고, 제국의 불온자로 낙인되어 늘 감시를 당하며 살아야했다. 삶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는 점점 커져 갔으며 경제적 손실이 커지면서 노예로 전락 당하는 가정들이 많아졌다. 결국 정신적 스트레스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귀신에 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세속을 벗어나 광야로 피난삼아 유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동굴을 은신처 삼아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반면 사두개파 귀족층들은 현실을 인정하며 그 속에서 최대한 복을 누리며 살 것을 인생의 목적을 삼으며 지냈으며,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걸고 율법을 사수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나타난 '갈릴래아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동족임에도 경계를 받아야했고 로마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로 수배 대상이 되었다. 힘 없는 서민들에게 소리소문 없이 '갈릴래아 사람'의 명성은 퍼져갔고 그는 죽음 이후에 더욱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었다. '갈릴래아 사람'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 실존했으며 저자는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여 소설형식의 이야기로 친근하게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파격적인 면을 보였다. 종교를 떠나 누구든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수성을 역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씌여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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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2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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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두 권의 책에서 다산 정약용의 젊은 날의 정치가이자 행동가, 실무자로 살았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지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파란 1권에서도 줄기차게 정민 교수가 이야기했던 점은 다산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한 듯 했으나 속으로는 천주를 믿고 의지했었음을 낱낱히 조사하여 밝히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경 신학교를 졸업한 제1회 졸업생 신부인 중국 본토 소주 사람 '주문모' 신부를 구출하고 도망가게끔 한 장본인이 다산이었다는 점을 다양한 문헌 속에서 찾아냈다. 다산이 아니고서는 조정의 색출 작업에서 주문모 신부는 꼼짝 없이 잡힐 수 밖에 없었다. 색출 작업이 있을 것이라는 고급 정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다산 뿐이었다!

 

둘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낙향했을 때 천주교의 핵심인물인 이존창을 손쉽게 검거하여 조정에 보고를 한 것은 당시 '주문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교세를 확장시켜야 했기에 천주교 핵심인물과 교통하며 전략상 이존창을 검거하여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야 했었다.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다산 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다산이 천주교 핵심인물과 비밀스럽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셋째, 다산과 관련된 인물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형 정약종부터 이승훈, 황사영, 윤지충 모두 집안 사람들이다. 다산이 살아 남아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는 겉으로 배교한 척 했다.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때는 다산 형제(정약전, 정약용)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1권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조 임금이 죽기 전 18년은 청년 정약용은 날개 단 듯 꿈을 이뤄갈 수 있었다. 한 번도 현장 경험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물리학적인 역학계산까지 척척해 냈다.(수원화성, 곡산 가계도)

 

"이래서 독서하는 선비가 필요한 것이다" 정조가 이가환에게 이야기한 말이지만 정약용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다산은 정조의 의중을 먼저 읽어 한발 앞서 나갔다. 정조 임금의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필요한 부분을 즉시 해결해 가는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어려운 일을 시켜도 다산은 척척 해냈다"

 

다산의 저작 중에 '목민심서'를 모르는 분은 없겠다. 지금의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어 내려갔을 때 지방관으로서 본을 보인 것들을 경험을 토대로 적어간 지방관 역행 수행서이다. 정민 교수는 혈기왕성했던 다산이 소송에 연루되어 억울한 심정으로 분을 내며 곡산으로 내려갔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대충 지방관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다산의 사람됨은 역시 출중하다. 훗날 신유박해 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곡산부사로서 선정을 베푼 일이 참작되어 유배형(강진)으로 감해 지는데 일익을 감당했다고 한다.

 

정민 교수는 청년 다산의 모습을 800쪽에 가까운 분량으로 1,2권 나누어 조사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이다. 앞으로 유배 시기 18년, 해배 시기 18년을 정갈하게 정리하여 독자들 앞에 내 놓는다고 한다. 박제화된 정약용의 모습이 아닌, 인간 정약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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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1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1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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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8)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산의 목숨을 노리는 정객의 칼 날을 온 몸으로 바위처럼 막아 준 사람이 정조 임금이다. 정조의 심복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다산은 총애를 받았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이들이 다산의 정치적 위치를 끌어 내리기 위해 그를 조준을 했고, 정조준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천주교였다. 천주교 말고는 다산을 위협할 수 있는 공격거리가 없었다. 임금이 든든한 배후로 받쳐 주고 있었기에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18년) 다산 정약용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천주교도 빼 놓을 수 없다.

 

정민의 다산독본 1권 『파란 1』은 청년 정약용을 다룬다. 그동안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 속 행간의 정약용을 연구한 정민 교수의 정약용 파헤치기를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껏 알려온 정약용은 '다산학'을 이룰 정도로 평범한 사람 치고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도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다산과 관련된 문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통해 인간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만, 18세기 조선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관련 사전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루한 읽기, 고단한 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정약용과 관련된 책 치고는 상당히수준 높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정약용에 대해 의욕을 가지고 읽기를 처음 시도하고자 하는 초보자분들은 약간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먼저, 정조 임금이 다산을 총애했던 이유를 보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 계열인 '남인'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청년 '정약용'이 눈에 들어왔다. 학술 군주로 유명한 정조 임금과 토론을 심도 있게 할 정도로 청년 '정약용'은 학문적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공부법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61)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133)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136)

 

정민 교수가 분석한 청년 '정약용'의 공부법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부에 있어서도 혁신을 추구했던 청년 '정약용'은 관습에 따라 공부해 온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고 그것이 학술 군주였던 정조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정조의 씽크탱크 격인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당당하게 입학시킨 정조는 청년 '정약용'에게 과로가 될 만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연구과제를 던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약용'은 완벽하게 과제물을 보고서로 올렸다. 인내와 끈기까지 겸비한 그는 정조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 일가가 포함된 남인을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포석을 많이 단행했다. 그 예로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이 있다. 격에 맞지 않은 글을 쓰지 말라는 임금으로서는 속 좁은 정책 제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행시킬 '남인' 세력을 전면에 세우기 위한 정치적 속임수라는 사실임을 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노론 자제들을 중심으로 당대 유행했던 청대 소품 문체의 수용과 겉멋이 든 삐딱한 글씨체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고의로 논점을 흐려 상쇄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121)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포함한 '남인'계열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사태를 자신의 비호 세력을 깍아내리기 위한 한낱 정치적 음해로 여기도록 애를 썼다. 윤지충의 제사 거부로 시작된 '진산 사건'은 충분히 정국의 태풍이 될 수 있었다. 정약용은 1784년 9월경 자청하여 이승훈에게 영세했고 그의 세례명은 약망,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승훈, 이가환 등 정약용 일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남인 중에서도 공서파측은 집요하게 천주교의 제사 거부를 들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 임금은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여 논쟁의 화살을 벗어나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천주교의 제사 거부가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계기를 정민 교수는 아래와 같이 조사했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308)

 

다시 요점을 정리해보면, 윤지충의 제사 거부는 중국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로부터 제사에 관한 답을 받기 위한 간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바로 교조주의적 관점을 지닌 프란치스코회 신부였다는 점이다. 결국 윤유일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답서를 천주교인들에게 내 놓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겠지만 만약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적응주의적 관점의 예수회였다면 병인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다고들 알고 있지만, 정민 교수는 문헌 또는 서로 오고간 서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밝힐 수 없었던 정약용의 마음을 행간에서 발견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교를 옹호하며 정치술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윤유일이 (중국으로 들고 간) 편지는 이승훈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중간생략) 이승훈은 처형당하기 전에 의금부 공초에서 북경에 보편 편지는 정약용이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쓴 것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309)

 

 정민 교수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최초로(?) 밝혀 내고 있다.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얘기다. 사도세자가 특별히 읽었던 소설책 목록 중에 북경에서 들여온『성경직해』, 『칠극』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사도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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