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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1 - 정민의 다산독본 ㅣ 파란 1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8)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산의 목숨을 노리는 정객의 칼 날을 온 몸으로 바위처럼 막아 준 사람이 정조 임금이다. 정조의 심복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다산은 총애를 받았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이들이 다산의 정치적 위치를 끌어 내리기 위해 그를 조준을 했고, 정조준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천주교였다. 천주교 말고는 다산을 위협할 수 있는 공격거리가 없었다. 임금이 든든한 배후로 받쳐 주고 있었기에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18년) 다산 정약용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천주교도 빼 놓을 수 없다.
정민의 다산독본 1권 『파란 1』은 청년 정약용을 다룬다. 그동안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 속 행간의 정약용을 연구한 정민 교수의 정약용 파헤치기를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껏 알려온 정약용은 '다산학'을 이룰 정도로 평범한 사람 치고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도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다산과 관련된 문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통해 인간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만, 18세기 조선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관련 사전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루한 읽기, 고단한 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정약용과 관련된 책 치고는 상당히수준 높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정약용에 대해 의욕을 가지고 읽기를 처음 시도하고자 하는 초보자분들은 약간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먼저, 정조 임금이 다산을 총애했던 이유를 보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 계열인 '남인'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청년 '정약용'이 눈에 들어왔다. 학술 군주로 유명한 정조 임금과 토론을 심도 있게 할 정도로 청년 '정약용'은 학문적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공부법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61)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133)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136)
정민 교수가 분석한 청년 '정약용'의 공부법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부에 있어서도 혁신을 추구했던 청년 '정약용'은 관습에 따라 공부해 온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고 그것이 학술 군주였던 정조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정조의 씽크탱크 격인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당당하게 입학시킨 정조는 청년 '정약용'에게 과로가 될 만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연구과제를 던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약용'은 완벽하게 과제물을 보고서로 올렸다. 인내와 끈기까지 겸비한 그는 정조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 일가가 포함된 남인을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포석을 많이 단행했다. 그 예로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이 있다. 격에 맞지 않은 글을 쓰지 말라는 임금으로서는 속 좁은 정책 제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행시킬 '남인' 세력을 전면에 세우기 위한 정치적 속임수라는 사실임을 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노론 자제들을 중심으로 당대 유행했던 청대 소품 문체의 수용과 겉멋이 든 삐딱한 글씨체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고의로 논점을 흐려 상쇄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121)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포함한 '남인'계열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사태를 자신의 비호 세력을 깍아내리기 위한 한낱 정치적 음해로 여기도록 애를 썼다. 윤지충의 제사 거부로 시작된 '진산 사건'은 충분히 정국의 태풍이 될 수 있었다. 정약용은 1784년 9월경 자청하여 이승훈에게 영세했고 그의 세례명은 약망,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승훈, 이가환 등 정약용 일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남인 중에서도 공서파측은 집요하게 천주교의 제사 거부를 들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 임금은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여 논쟁의 화살을 벗어나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천주교의 제사 거부가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계기를 정민 교수는 아래와 같이 조사했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308)
다시 요점을 정리해보면, 윤지충의 제사 거부는 중국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로부터 제사에 관한 답을 받기 위한 간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바로 교조주의적 관점을 지닌 프란치스코회 신부였다는 점이다. 결국 윤유일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답서를 천주교인들에게 내 놓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겠지만 만약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적응주의적 관점의 예수회였다면 병인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다고들 알고 있지만, 정민 교수는 문헌 또는 서로 오고간 서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밝힐 수 없었던 정약용의 마음을 행간에서 발견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교를 옹호하며 정치술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윤유일이 (중국으로 들고 간) 편지는 이승훈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중간생략) 이승훈은 처형당하기 전에 의금부 공초에서 북경에 보편 편지는 정약용이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쓴 것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309)
정민 교수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최초로(?) 밝혀 내고 있다.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얘기다. 사도세자가 특별히 읽었던 소설책 목록 중에 북경에서 들여온『성경직해』, 『칠극』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사도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