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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자서전이나 회고록 등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작품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폴로기아apologia"라고 했다는데 죽음 직전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라고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함이거나, 자아비판의 날을 세워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을 밝혀 죄값을 치르기 위함이거나, 죽기가 억울하고 원망스럽다면 글을 쓰면서 한을 풀어내며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함이거나……. 이 책의 주인공 애덤 워커도 예순의 나이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일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던 스무 살 한 해를 회고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이, 주인공이 과거를 회고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의 일생이 아무리 파란만장하다 하더라도 일련의 사건들을 나열하기만 한다면 밋밋하고 재미가 없었을 텐데, 작가 “폴 오스터”는 1부는 애덤 워커가 “나”를 이야기하는 1인칭 시점으로, 2부는 애덤 워커가 애덤 워커를 “너”라고 이야기하는 2인칭 시점으로, 3부는 애덤 워커의 친구 짐이 애덤 워커를 “그”라고 이야기하는 3인칭 시점으로 엮어 놓아 신선하고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인칭의 변화를 주는 기법도 절묘하다. 애덤 워커가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회고하는 1인칭에서 2인칭으로 가게 된 이유는, 회고 도중 엄습해온 두려움 때문에 글쓰기가 중단되었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글을 쓰기 위해 옛 친구이자 작가로 성공한 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짐은 애덤 워커에게 1인칭 서술은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으니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려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인칭에서 3인칭으로 가게 된 이유는? 애덤 워커가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개요만을 쓴 채 사망했고 그 개요에 대한 모든 권한을 짐에게 넘겼으며 짐이 애덤 워커의 이야기를 써나갔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는 단순히 챕터를 나누어 인칭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흘러가면서 인칭이 바뀔 수밖에 없도록 정말 교묘하게 장치해 놓았음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폴 오스터의 천재성, 짝짝짝. 이쯤에서 리뷰를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제목이 왜 <보이지 않는>일까 생각하며 책을 읽어서 소설 속에서 <보이지 않는>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반가웠고, “비현실감이 너를 엄습해왔다. 그것은 네가 거기에 있지 않은 듯한 느낌, 너라는 신체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 자신도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등등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는 문장들에 밑줄도 쳤다. 살아가면서 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아폴로기아를 쓰면서 인생을 되돌아 <보는> 거지 뭐. 죽어가는 사람들은 <보여주지 않았던> 진실을 <보여주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나봐. 이렇게 쉽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275쪽을 읽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배신감과 우롱당한 기분 나쁨과 이건 뭐야 하는 충격이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에 관해서는…… 가명을 쓰기로 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책 속의 애덤 워커가 실제로는 애덤 워커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그윈 워커 테데스코는 그윈 워커 테데스코가 아니고, 마고 주프루아도 마고 주프루아가 아니다. 엘렌과 세실 쥐앵은 엘렌과 세실 쥐앵이 아니고, 세드릭 윌리암스도 세드릭 윌리암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샌드라 윌리엄스는 샌드라 윌리엄스가 아니고, 그녀의 딸 레베카도 레베카가 아니다. 심지어 보른도 보른이 아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실제 이름이 짐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이런, 젠장, 내가 너무 이 책에 푹 빠져 있었구나. 소설은 픽션이라는 삼척동자도 아는 말을 책을 읽는 내내 잊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애덤 워커의 이야기가 논픽션이라고 믿으면서 읽었던 것이 아니야. 애덤 워커의 친구인 짐! 애덤 워커의 이야기를 대신 쓴 짐이 작가라는 것을 간과한 거야! 영악한 폴 오스터. 작가 폴 오스터는 픽션 <보이지 않는> 속에 자신과 닮은꼴인 작가 짐을 허구적으로 만들어 넣고 짐은 논픽션인 애덤 워커의 이야기-애덤 워커는 자신의 이야기를 논픽션이라고 했다-를 또한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픽션 속 논픽션, 논픽션인 줄 알고 있는데 픽션이라고 선언, 픽션 속 논픽션은 논픽션이냐 픽션이냐, 픽션이 정말 픽션인지, 논픽션이 정말 논픽션인지……
“INVISIBLE”과 “VISIBLE”. <보이지 않는>을 읽는 내내 뭐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무언가를 보기 위해 읽었고 보고 있다고 자만하며 읽었다. 책을 덮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아. 알고 있지만 아는 게 아냐. 중요한 게 중요한 게 아냐. 진실이지만 진실이 아냐. <내가 X씨가 되면, 그는 더 이상 나일 수가 없고,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이상 원하는 만큼 많은 새로운 사항들을 추가해 넣을 수 있지.> 내가 멀지 않은 미래에 죽어갈 때 애덤 워커처럼 회고 글을 쓰고 나의 지인들이 모두 죽고 내 회고록만 남게 된다면, 그건 논픽션인가 픽션인가 그리고 진실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