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저자가 머릿속에 잉태하여 출판사라는 조산원의 도움을 받아 낳은 저자의 자식으로서 독자들이 보모 역할을 하며 키우지 않으면 자라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가 안타깝게 사라져버린다. 그런 책은 생각이 사는 집이며,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고, 절망의 치료제이고, 수많은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 상자이기도 하다. 책은 눈이 올 때나 비가 올 때나 서재에 있을 때나 기차를 탔을 때나 그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삶의 동반자이다. 



꽃들에게 희망을 / 트리나 포올러스


이 책은 그림이 곁들여진 짧은 이야기이다. 쉽고 평범한 문체로 쓴 책이라 누구나 힘 안들이고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일순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삶의 의미가 흐려질 때 마다 이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광장 / 최인훈


대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민음사판(1973)으로 처음 읽었다. 이명준이라는 젊은이의 사생활과 분단 상황이 얽혀 전개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을 사회 속에 넣어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책을 읽은 지 얼마 후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밀스(C. W. Mills)라는 사회학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법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책을 약 10년에 한 번씩 다시 읽는다. 


앎과 삶 / 이규호 

 

인문학과 사회학에서 앎의 원천은 삶이다. 나의 개인적 삶은 내가 하는 학문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은 앎과 삶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내가 삶이 쏘옥 빠져버린 메마른 과학적 사회학이 아니라 머리를 맑게 하면서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하게 된 시발점에 이 책이 있다. 누렇게 빛이 바랜 그 책은 아직도 내 서가에 꽂혀 있다. 


지식인의 표상 / 에드워드 사이드


1994년 여름, 미국 보스턴에서 영어 원서로 이 책을 처음 읽었다. 1996년에 나온  이 책의 첫 번역판에 오역이 많았는데 2012년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나는 이 책에서 사이드가 제시하는 것처럼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로, 권력추구가 아니라 권력비판으로, 안락한 정주자가 아니라 자발적 유배자로 살아가는 참된 지식인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둥지의 철학 / 박이문


팔순이 넘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이 자신의 철학 인생을 정리하고 종합한 노작이다. 저자는 종교, 철학, 과학, 예술의 영역을 오가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관을 시적 철학이자 철학적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둥지의 철학’으로 종합했다. 지적으로 투명하고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추구한 철학자 박이문의 무르익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감성적으로나 지적으로 자신에게 편안한 철학적 둥지를 짓고 그것을 끊임없이 리모델링하며 사는 삶이다.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 / 박영신


체코의 반체제 극작가로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가 동유럽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된 양심적 지식인 바츨라브 하벨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리 안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힘없는 자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특정 상황에서 역사를 바꾸는 동력이 되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눈앞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의 의미세계와 이어져 있는 사람만이 문제가 많은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사당동 더하기 25 / 조은


이 책은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 가난한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과 함께 같은 기간 동안 촬영한 영상 기록이 DVD로 첨부되어 있다. 4세대에 걸쳐 전개되는 가족 이야기를 추적하는 이 책은 가난이 어떻게 대물림되는가를 구체적인 현장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멀리 위에서 날면서 하는 메마른 설문조사가 아니라 발로 뛰며 땀 흘리는 밑으로부터 하는 현장연구의 전범을 제시한다. 


지도와 영토 / 미셸 우엘벡


저자는 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예술가를 등장시켜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며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의 고립된 삶의 방식을 통해 한 때 영광스러웠던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한다. “부는 유복함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 어린 시절부터 유복함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행복하게 한다. 어려웠던 인생 초창기를 겪은 사람이 갑자기 부를 손에 쥐면, 그를 엄습하는 첫 번째 감정은 바로 공포다. 때로 잘 대처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결국은 부에 완전히 잠식당하기에 이른다”와 같은 사회학적 통찰이 담긴 문장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한 딸이 노동자 출신으로 지방에서 작은 식료품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읽으면서 문화적 불평등이 낳는 ‘상징적 폭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작가는 ‘문화자본’과 ‘아비튀스’라는 개념을 밑에 깔고 어린 시절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아버지와 더 이상 가깝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과정을 거리를 두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건 아버지와 딸 사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좋은 소설은 사회학 논문보다 힘이 세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 문학의 원점은 아버지와의 갈등관계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편지를 쓰게 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카프카의 이 보내지 못한 편지는 그가 평생 겪은 정신적 고통을 공감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를 제공한다. 이 긴 편지는 문학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진정한 삶을 살려는 아들과 아들의 세속적 성공만을 바라는 자수성가한 아버지 사이의 특수한 갈등을 표현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부자관계의 보편적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추천인 : 정수복 (사회학자)


걷는 사람이다. 도시를 걷듯이 책 속을 걷는다.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주변부와 중심부를 자유롭게 오가고,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를 가로지르며, ‘당연의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물론의 세계’를 흔들어놓는다. 그는 사회학자이면서, ‘과학적 사회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지향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울의 연세대학교와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인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저서 『의미세계와 사회운동』 『녹색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은 보다 인간적인 사회학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한 시도의 기록들이다. 


1999년에서 2001년 사이에 KBS TV <정수복의 세상 읽기>와 CBS 라디오 <시사자키>의 진행을 맡으며 동시대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하던 그는 2002년 돌연 서울을 떠나 다시 파리로 갔다. 


그후 10년 동안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이 파리 곳곳을 종횡무진 걸으며 새로운 사유와 글쓰기 방식을 모색했다. 파리 체류기간에 출간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는 2007년 출판문화대상을 수상했고, 『파리를 생각한다-도시 걷기의 인문학』은 문화체육관광부 권장도서, KBS <책 읽는 밤>이 선정한 ‘2009년의 재미있는 책’, YES24 선정 2009년 추천도서로 꼽혔다. 이후 『파리의 장소들-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을 펴내며 사유하는 산책자로서의 통찰을 담았다. 


2013년 지금은 서울과 파리를 오가고 도시와 책 속을 걸으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정수복 님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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