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업실이자 서재에는 책이 별로 없다. 이유는 두 가지. 우선 나이 들면서 소장하던 책을 지인들에게 그냥 나눠주는 버릇이 생긴 것. 내가 죽고 나서 먼지 쌓인 책들이 유령처럼 작업실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두 번째 이유는 사전처럼 되풀이해서 뒤적일 만한 책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 책의 경우 바다 건너에서 명저들이 시나브로 출간되어 얼마나 부럽고 다행스러운지. 잘 팔리지도 않는 두툼한 과학 책들을 꼬박꼬박 번역해내는 몇몇 출판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자주 오르가슴을 느낀다.
괴델, 에셔, 바흐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책이다. 1988년 우연히 이 책을 보고 과학칼럼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까치 박종만 사장에게 번역을 시나브로 권유하기도 했다. 1999년 출간 이후 20년 만에 번역판을 펴낸 박사장의 집념이 없었더라면 국내 독자들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융합한 세계적 화제작을 접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욕망의 경제학 / 피터 우벨
행동경제학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국내 독서 풍토가 이해가 되지 않긴 하지만 한편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행동경제학만큼 흥미로운 접근방법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에 <행동경제학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제목의 해제를 보태서인지 지식융합 강연을 다니면서 행동경제학의 기본적 이해를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강추하고 있다.
인문학자, 과학기술을 탐하다 / 박이문 외 공저
융합은 이 시대의 핵심 화두이다. 특히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은 스티브 잡스 덕분에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에 대해 깊은 이해와 식견을 가진 대표적 인문학자들의 글이 20편 넘게 실려 있는 이 책이 기획되지 않았더라면 한국사회의 융합 논의는 얼마나 공허하고 시시했을까.
촛불, 횃불, 숯불 / 김지하
“통섭. 이 단어는 앞으로 틀림없이 저주받은 말로 전락할 것”(231쪽)이다. 생물학으로 학문 통합하자는 고유명사인 ‘컨실리언스’가 생뚱맞게 원효스님의 사상을 빌려 ‘통섭’으로 번역되어 지식 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옷깃도 스친 적 없는 내가 촛불집회에 대해 <조선일보>에 발표한 칼럼을 언급한 대목(237쪽)도 나온다.
갈릴레이의 생애 /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의 희곡은 어느 과학서적보다 절절하고 실감나게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다. 뒤렌마트의 희곡 역시 전율을 느낄 만큼 울림이 크다. 연구는 시늉만 하고 외제 박사학위를 앞세워 정치 권력에 부나비처럼 아첨하는 정치과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꼭 스테디셀러가 되고 말아야 할 책이 아닐는지.
빈 서판/스티븐 핑커
이 책을 영어사전처럼 참조하면서 나는 자주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인지괴학, 뇌과학, 진화론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정치, 섹스, 인문학, 예술 등에 관해 명쾌한 논리를 전개하는 글 솜씨에 압도당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저술가가 미국과 영국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니. 서재의 명당자리에 꼭 꽂아두고 시나브로 펴보면서 나를 담금질한다.
추천인 : 이인식 (과학칼럼니스트, 지식융합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지식융합연구소 소장이며, 과학문화연구소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과학 칼럼니스트 1호로서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한겨레》《부산일보》 등 신문에 470편 이상의 고정 칼럼을, 《월간조선》《과학동아》《주간동아》 《한겨레 21》등 잡지에 160편 이상의 기명 칼럼을 연재하며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융합한 지식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2011년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월간지 《PEN》에 나노기술 칼럼을 연재하여 국제적인 과학 칼럼니스트로 인정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과학 칼럼이 수록되었다. 제1회 한국공학한림원 해동상,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2006년 《과학동아》 창간 20주년 최다 기고자 감사패, 2008년 서울대 자랑스런 전자동문상을 수상했다.
이인식 님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