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청에서 매년 여름 대학생을 위해 하는 이벤트로 '내일路'라는 것이 있다.  

24살, 만 22살의 나는 당시 부산사는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힘겨워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주성치의 영화와 무한도전만 시청하다 자다가를 반복하며 피폐해져가고 있었고, 방학 내내 준비한 토익과 한자시험을 모두 망쳐버리고는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이별의 대응하는 방법중에 하나였고, 성격상 그러고 집에 처박혀있을 수도 없어서 동생을 데리곤 5만얼마짜리 내일로 티켓을 끊어서 여행길에 올랐다.  

경상도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여수->남원->곡성->전주->대전->제천->도계(-_-)->동해->강릉->증산->봉평->원주->서울의 순서로 기차를 타고 칙칙폭폭 수많은 도시들을 지났다. 너무너무 소중한 기억들이라 언젠가는 꺼내어 놓으려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너무 덥거나 추운 찜질방에서 한참을 잠못이루었던 건 낯선 곳이라는 불안감보다도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더운 날씨에 오동도와 돌산대교를 하루종일 오르내리며 지친 터라 찜질방의 얼음방에서 한시간 넘게 꽁꽁 얼었던 탓도 있겠고. 잠시 잠이들자마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향일암으로 가는 첫 버스에 올랐다. 괜히 알차게 여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무척 들떠있었는데, 그 땐 향일암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랬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수룩하게 새벽빛이 들기 시작했고 행여나 일출을 놓칠까봐 사람들을 따라 오르막길을 열심히 올랐다. 조금만 가면 저 위에 향일암이 있겠구나. 하는 얼척없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오르면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향일암에 대한 정보는    
1. 절이다. 
2. 일출이 멋있다.
3. 돌산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xx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이것 3개 뿐이었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평소 사전정보 없이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 뒷통수를 치기 위해 존재하듯이 그곳은 너무나도 가파르고 높은 절벽 위에 있었다는것을 난 2/3가량은 오른 후에야 깨달아버렸다. 매일 있는 일출따위 보려고 내가 이렇게 올라야 하나 후회와 회한을 몇십번씩 반복했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생각은 흐르는 땀에 씻겨져 나갔고, 동생과 나는 물론 주위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다들 그저 오르기만 했다. 울 것같은 마음으로, 아니 벌써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도 생각난다. 정상에 도착하기 직전, 왜 모든 산에서는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마지막 오름이 가장 힘든걸까, 라고 무거운 배낭을 움켜쥐고 한발 내딛던 순간을.



실컷 봐두었으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그 다짐은 2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난 너무나 당당하게도 향일암을 베스트여행지로 추천은 하되 내가 갈일은 없을거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내가 하하호호 신나게 노는동안 그곳은 설계도가 남았다는 핑계를 대며 사라져버렸다. 향일암, 대형 화재, 대웅전, 소실 로 이어지는 내 사진에 남겨진 댓글을 보면서도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건지 분명 텍스트를 읽었음에도 향일암이 없어졌단 걸 모르고 있었다.  

메인에 뜬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당황하고 어느새 젖은 목소리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는 동생에게 '야.. 향일암...' 이라고 했더니 동생이 환히 웃으며 '아..!!!! 좋지, 향일암' 하며 꿈꾸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이 일제 시대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왜 모든것들이 사라져가느냐며 화내는 동생에게 나역시 '그러니까.'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도 없는 우리에게 과거의 추억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  

그래도 '조금 더 많은 사진을 남겨둘걸, 한 번 더 가볼걸, 일정은 신경 끄고 조금 더 오래 머물며 나무냄새와 돌향기에 좀 더 취해있을걸,' 이깟 후회는 치워두고 그 자리에 그리움만 채워두어야 한다는 걸 안다. 향일암이 내게 그 사람과의 사진이나 못다한 약속,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말들에 대한 집착과 후회의 공간은 낭비일 뿐이라며 그 자리를 비워내고 따뜻한 추억만을 채워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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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흔적
    from 마지막 키스 2009-12-21 18:45 
    뽀게터블님.  추억에 관련된 시를 드릴까, 이별에 관련된 시는 너무 아프겠지, 하다가 골라낸 것이 '흔적' 이에요. 제 댓글은 이걸로.          흔적 &#
  2. 향일암을 추모함
    from 道를 아십니까 2009-12-21 19:53 
    할머니를 보내 드리느라 세상과 며칠 격리되어 있다 가까스로 다시 발을 들여놓은 어젯밤, '향일암 전소'라는 인터넷 기사 제목을 마주해 버렸다. 정황파악을 위해 기사를 클릭하기는 했지만 부러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내게는 낙산사 화재보다, 숭례문 전소보다 더 먹먹한 소식인지라 궁금한 게 많을 법도 하지만, 아마 오랫동안 기사를 정독하는 일은 없지 싶다.향일암 올라가는 길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험했었다. 변변한 계단도 없고 사람 하나 빠져 나가기가...
 
 
perky 2009-1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멋지고 글도 참 와닿아요. ^^
향일암에 화재났다는 거..이 글 읽고야 알게 됐어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Forgettable. 2009-12-21 14:10   좋아요 0 | URL
아침내내 우울해서 사진만 뒤지고 있네요. 왜이리 사진을 많이 찍어놓지 않았던건지 아쉬워요. 그래도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요 ^^

일출을 보며 감동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습니다. ㅎㅎ 진짜 마지막이었네요. 흑흑 ㅠㅠ

뷰리풀말미잘 2009-12-2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6년 전 쯤에 갔었는데 그때도 참 좋았어요. 절벽에 멋들어진 절간이 턱 걸터앉아 있고 먼 바다에서 해가 두둥- 하고 뜨니까 와 벌어진 턱이 다물어지지가 않더군요! 그때 찍은 사진은 하드가 소실되면서 사라졌구요 남은건 그녀가 찍었던 4*6사이즈 현상사진뿐이라 저는 자랑할 수도 없네요.

하지만 뽀님 추억은 불태워지는게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불타기 전에 만든 추억은 영원히 불타지 않아요.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불타기 전에 갔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Forgettable. 2009-12-21 15:25   좋아요 0 | URL
6년 전이라.. 갑자기 미잘님의 나이에 대한 확신이 혼란스러워지는군요. -_- 뭐 어릴 때도 여행은 다닐 수 있는거지만, 그녀와의 여행이라니, 중얼중얼.. (이 중얼중얼 버릇 누구한테 옮은거지)

제 추억은 괜찮아요.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땀으로 얼룩져 번들거리고 벌개진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곤 흠칫 놀랬던 기억도 아직 생생한걸요. 그런데 그냥 미처 그곳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아직 못가보셨는데 ㅠㅠ 여튼 그만 우울해해야지, 이거참 안그래도 예민한데;;

푸하 2009-12-21 16:54   좋아요 0 | URL
현상사진이라도 보고 싶군요. 안되면 스캔이라도...^^: 음 6년전이라... 두 분이 좋은 곳이라고(었다고) 하니 정말 아쉬워지는 군요.ㅠㅠ

푸하 2009-12-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헤어지게 되면 2/3지점에서 힘듦을 깨달을 만하면서 목적지가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야겠어요. 음... 근데 그런 곳은 미리 계획해서 가는 것이 불가능할 듯...ㅎㅎ~

Forgettable. 2009-12-22 09: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미리 계획해서, 완전 열심히 올라가 보리라 결심하고 갔다면 그 광경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겠지요, 너무 힘들어서 힘든줄도 모르는 데다가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던 터라 ㅎㅎ

다른 어느 문화재 소실보다도 더 마음이 안좋습니다.

머큐리 2009-12-2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보고 그냥 무덤덤했었는데...뽀님이 안타까워하니 다시 한 번 보게 되더라능~~
그래도 해는 계속 떠오르겠지요...흠

Forgettable. 2009-12-22 09:24   좋아요 0 | URL
많이 더울 때였는데 따뜻한 이미지로 남아있어요.
해는 계속 떠오를테고 그곳에서 보는 일출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위안삼고 있습니다.

2009-12-2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2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3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Demian 2009-12-22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 한 해는 불로 시작해 또 불로 끝나는군요. 도대체 무슨 아홉수(?!)가 이리 지독히도 끼었답니까. ㅠㅠ
개인적으로도 올 한 해는 정말 다사다난, 파란만장했답니다. 그래도 즐거운 성탄절, 따뜻한 연말보내시라고 인사하러 들어왔는데 주인 잃은 러브레터가 마음을 썰렁하게 하네요.ㅠㅠ

여튼 썽님~올 한 해 썽님과 썽님 블로그를 알게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놀러왔지만, 내년에도 우리 자주 만나요^^ㅎㅎ

우울함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연말 보내시길 바래요. 메리크리스마스!!! +_+!!!!!!!!

Forgettable. 2009-12-22 09:39   좋아요 0 | URL
데미안님, 요즘 블로그 뜸하시던데 오랜만이라 반가워요! ^^
아홉수만 넘기면 정말 괜찮아질지 모르겠어요. ㅠㅠ 정말, 아홉수라 이런 한해였던거면 좋겠어요.

저도 데미안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무지 행복했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요 ^^
크리스마스 신나게 보내세요!!

조선인 2009-12-2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겟터블님과 따우님 글을 읽으니 정말 가슴이 아파오네요.

Forgettable. 2009-12-22 09:40   좋아요 0 | URL
전 따우님 글 읽고 울뻔했지 뭡니까;;

순오기 2009-12-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향일암을 못 가봤는데 영원히 가볼수 없는 곳이 됐군요.ㅜ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도 없는 우리에게 과거의 추억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
공감의 쓰나미에요.

Forgettable. 2009-12-2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 아쉬움이 크실것 같아요. ㅠㅠ
재건축 한다해도 옛모습이 남지 않겠죠.

순오기님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호호
 

짧은 비행시간동안 후르륵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다. (왜 상품넣기가 안되지;;;; 난 불매운동 참가도 안하는데-)
개인적으로 조르바보다 마음에 든다. 굳이 조르바를 언급하는 이유는 꽤나 비슷한 캐릭터라서, 이 노인이 계속해서 조르바를 연상시키는데, 이 노인이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란 점에서 점수를 약간 깎아먹었다. 

아마존은 역시 굉장히 끔찍한 곳일 것이라는 걸 재차 확인했던 독서였지만, 한번쯤은 가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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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12-1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뭘 해도 뽀님이 이뻐 보인다는데....얼마를 걸어야 하는 건가요???
암튼 하고 싶은 건 일단 질러보자는게 제 주의라..ㅎㅎ 그냥 함 하세요

Forgettable. 2009-12-16 23:19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째끔만 거세요. 한 이십원 정도 ㅋㅋ 왜냐면 잃으실게 분명하니까!! 사진 올리니까 즐찾이 막 빠지는데요 ㅋㅋㅋ ㅠㅠㅠㅠ

안그래도 동생이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며 설득해서 조만간 지를 것 같아요 ㅋ

무해한모리군 2009-12-16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쁘다~~~~~~~~~
머리 뭐 자르면 다시 자라는데 일년씩 고민해요. 확 해버려용 ^^

Forgettable. 2009-12-16 23:23   좋아요 0 | URL
그쵸ㅡ 안그래도 나이들어 보여서 더 늙어보일까봐 보류했는데 ㅋㅋ 걱정 하지말고 그냥 잘라볼까봐요 ㅎ
휘모리님은 머리때문에 고민하는 여인네들에게 매번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듯 ㅎㅎ

아포지 2009-12-1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놀래라.... 후다닥...

Forgettable. 2009-12-17 09:26   좋아요 0 | URL
흥-
놀리면 혼난다니까요 ㅎㅎㅎ

Joule 2009-12-17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댓글 다신 분들, 미인 사진을 감상하셨으면 당연히 추천을 누르셔야죠. 공짜 좋아하면 배탈 나요.

포케터블 님, 눈동자가 커서 꼭 써클렌즈 한 것처럼 보여요. 예쁜 트렌스젠더 느낌도 나구요. 머리는 자르시는 게 좋겠어요. 머리 자르면서 관리하기 좋게 볼륨매직도 같이 해주시는 센스 잊지 마시구요. 짧은 머리가 훨씬 지적이고 앙큼해 보여서 매력 있어요.

Forgettable. 2009-12-17 09:29   좋아요 0 | URL
쥴님!! ㅋㅋ 추천 감사합니다 ^^

제가 스스로 이쁘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지만 남자였다면 잘생겼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많거든요. 예쁜트렌스젠더라니, 진작 남자로 태어났어야 (..)
굳히기를 해주시는군요. 주말에 머리해야겠어요! ㅋㅋ

뷰리풀말미잘 2009-12-1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도 괜찮을 거 같아요. ㅎㅎ

Forgettable. 2009-12-17 12:57   좋아요 0 | URL
심사숙고해보겠슴다. ㅋㅋ
실패하면 책임지세요!

lazydevil 2009-12-1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진 몽타주... 파장이 컸나요??

Forgettable. 2009-12-19 11:48   좋아요 0 | URL
데빌님! 한발 늦으셨어요. ㅎㅎ 위의댓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열화와 같은 반응;;; (은 아니구요)
오늘 자르려고 했는데 늦게일어나는바람에.. 아 이렇게 어영부영하다보면 못자르는거 아닌가 몰라요 ㅠ

lazydevil 2009-12-21 01:48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걱정마세요. 진작 봤슴다...ㅎㅎ

Forgettable. 2009-12-21 10:44   좋아요 0 | URL
오호, 데빌님을 위해 의도치 않게도 귀여운 단발인증샷을 올려볼까 했는데 안해도 되겠네요 ^^
 

프리 티벳 운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 

몸과마음을 모두 소진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티벳인들의 생각은 어떠니? 

친구는 쓰게 대답했다. 정작 핍박받는 티벳인들은 무력하고, 자유를 향한 의지가 없다. 그래서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 

글쎄- 

라고 갸웃거렸던 것 같다. TV에서 무기력한 티벳인들을 스치듯 봤었고, 이미 답을 알고 잔인한 질문을 했었다. 난.  

 

정의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적은 있을까? 

그저 내 밥그릇 부둥켜안고, 내게 주어진 작지만 큰 쾌락을 즐기기에도 시간과 마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의가 뭐가 중요해. 당장 나도 내일 잘려도 이상할 것 없는 비정규직인걸- 

며칠 바쁘기도 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페이퍼질을 하던 난 이곳의 분위기가 불편해져버려서 페이퍼를 쓰다가도 지웠다. 

김종호씨 사건을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본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개념없는 알라디너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꾸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혼자서 그러다가 모순투성이가 되어버려서 한입으로 네말, 다섯말 하고 그랬다. 

근데 그냥 인정하자 싶다.  

간단하게 '우리 세대에서 변할 수 있을까?' - 이렇게 기한을 멀리 잡아도 앞은 여전히 깜깜하다,  

앞으로 세상은 더 경쟁구도가 될 것이고, 나는 내 밥그릇을 더 꽁꽁 쟁여두게 될 것이고, 자본은 나를 더욱더 잠식할 것이다.  

나는 점점 더 내 우물 안 쾌락에 안주하게 될 것이고, 남의 밥그릇은 신경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난 무심히 스치듯 본 TV 속 티벳인들처럼 무참히 핍박당하면서도 모른척, 외국에서까지 내게 자유를 주려하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는 것도 모른척, 하면서 무력하게 내 상한 밥그릇만 생각하면서 가끔 배탈이 나긴 해도 행복하게 살 것 같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것이 희망이긴 한데,, '헛된'희망이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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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ei 2009-12-15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복잡한 생각은 미모에 도움이 안돼. (X)
이런 성찰에서 배어 나오는 미모야 말로 진정이다. (O)

Forgettable. 2009-12-15 01:37   좋아요 0 | URL
똑똑-
OX가 바뀐거 아닙니까? ㅋㅋ

이게 뭐 성찰인가요. 열심히 정의를 구현하는 분들 힘빼는 잡설이죠. 저같은 사람들 때문에 앞날이 더 깜깜한건가요!!?? 아웅 배고파 ㅎㅎ

뷰리풀말미잘 2009-12-15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우리 뽀님을 개념없는 알라디너로 본답니까! 걱정도 팔자에요. ㅎㅎ

위의 레이시즌님의 댓글이 투표라면 저는 전자에 하겠어요. 좋은 밤입니다. 복잡한 생각 뽀님.

Forgettable. 2009-12-15 01:49   좋아요 0 | URL
저 개념없잖아요. 아 개념없단 형용사는 이제 너무 친근해요. ㅋㅋㅋ
아놔 이제 잘시간인듯. 제가 댓글쓰는 걸 제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현상이 벌어지네요.

이시간에 글을 쓰니 레이님과 미잘님을 만날 수 있네요. 좋아라 ㅎㅎ

Arch 2009-12-15 11:25   좋아요 0 | URL
나도 전자에 한표. ^^
뽀님, 헛된 희망이라도 있어야 난 좀 살거 같아서, 내가 편하려고 하는거에요. 게다가 프리 티벳하는 친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사치스러운 행동일 뿐이구요.
뽀님 생각은 나랑 비슷해요, 알죠? (강요 아니에요! ^^)

Forgettable. 2009-12-15 14:47   좋아요 0 | URL
그게 나한테나 헛된희망이지 아치님껜 알찬희망이잖아요! 믿습니까? ^^
그리고 전혀 사치스럽지 않아요. 알면서~♡

근데 레이님 댓글 진짜 센스있지 않나요? ㅋㅋ

Arch 2009-12-16 01:32   좋아요 0 | URL
글도 센스있는 분이니, 뭐! 난 그저 뽀가 부러울 뿐이고~ (우리 둘만 알도록 해요. 속닥속닥 ^^)

Joule 2009-12-15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데요. 원래 그 상자가 재앙의 상자잖아요. 그런데 제일 밑바닥에 있던 게 희망이었으니까 희망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재앙이라는.

인간은 역시 잘 때는 자야 해요. 그죠? ☞☜

Forgettable. 2009-12-15 14:50   좋아요 0 | URL
그쵸. 그게 샤방샤방 예쁜 동화책에서나 희망이지, 신화적으로 해석해보면 무시무시한 것 같아요-_-
잘 땐 자야해요. 저 오늘 계속 헤롱거리고 있어요 ㅠ_ㅠ
쥴님 몸조심하세요~ 잠 맨날 늦게 주무시다가 아프지 마시고!

푸하 2009-12-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지... 이해력이 뛰어나다 싶더니 많은 고민들을 하고 계시는 군요. 풀리지 않는 고민이 사실 미모 뿐아니라 매력의 앙양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구요.^^:

Forgettable. 2009-12-15 21:13   좋아요 0 | URL
오 레이님,미잘님,아치님의 견해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시네요 ^^
시험은 잘 치르고 계신가요? ㅎ
 

 



 

The killers 가 내한한다. 2010년은 내한의 해인 것인가! 난 한국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ㅠ_ㅠ  
일본 가기 전 선심쓰듯 잠시 한국에 들러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가고싶다. 가고싶다. 가고싶다...... 

그린데이도 꿀꺽 참아졌는데, 킬러스는 모르겠다. 지금도 표가 팔려나가고 있어, 젠장. 
난 스타를 바라보는 군중 속의 한명이 되는 느낌이 너무 괴로워서 콘서트에 가지 않는 편인데, 그 느낌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서 놀고싶다. 아아,, 사랑해요 살인마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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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12-1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마를 사랑하다니! ㅋㅋ
누구여, 이러고 말라고 했는데 재생을 눌렀잖아요. 목소리가 무척 매력적인데요. 군중 속 한명이라도 가봐요, 가봐요. 뽀!

Forgettable. 2009-12-1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할수밖에 없다구요. 나의 우울증을 날려버리는 살인마들인걸 ㅠㅠ
고민이지만, 스탠딩 혼자가는거 한번으로 족해요.
내가 군계일학도 아니고 그저 닭한마리일뿐이라는거 인정하는 것도 서러운데 혼자서 좋다고 놀고 힘빠져서 집에 혼자 오는 길은 엄청 쓸쓸하더이다.

머큐리 2009-12-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마치곤 목소리가 달콤한 편인데요... 굉장한 헤비메탈이 아닌가 했는데...
이 노래만 그런건가요?? ㅎㅎ

Forgettable. 2009-12-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들의 음악은 굉장한 헤비메탈이랑은 거리가 멀어요. 살인마의 종류도 여러가지라능 ㅋㅋ
머큐리님 왜케 오랜만이죠?? 우리 봐야하는데-
제가 요즘 몸도 안좋고 바쁘고 해서 ㅠㅠ 에휴

새벽 2009-12-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킬러스네요.. 아직 안들어봤어요 ㅋ 한국 들렀다 가시면 그 때 들어봐야겠네요 ㅋㅋ
하아 시험 때문에 못 들어왔지요 ㅠ 내일부터 시험 시작이에요!
근데 시험 끝나고 있을 축제 생각만 간절하네요 ㅎ

Forgettable. 2009-12-1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모를 클릭만 하면 들어보실 수 있어요. 4분만 투자하시면 됩니다. ㅋㅋ
지금 시험보고 계시겠네요. ^^ 방학 전에 축제도 있나요? 와- 전 고등학교 축제는 거의 기억도 안나네요;; 남의 축제 구경갔던 기억만 조금 ^^;;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후줄근하고 언제나 지쳐보이던 선생님이 있었다. 정교수도 아니고 부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의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라 항상 안쓰러워 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BMW를 끌고 다니고, 옷이 모두 명품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든 건 왜였을까. 언제나 무기력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휴강도 밥먹듯이 했고, 나 역시 선생님의 목소리가 붕붕 허공에 뜬 것만 같은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지만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고, 수업도 참 좋아했다. 

매 학기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했고, 벤야민과 료따르, 아도르노, 라깡의 이름을 수도 없이 들어서 난 그들의 철학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세의 미학, 르네상스의 매너리즘, 해골과 썩은 사과, 시든 장미의 미학,대중문화의 복제에 대한 회의감 등 나의 미학적인 관점은 물론, 인생관도 선생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밥 한번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게 판타지의 완성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에서 책등을 쓸며 부유하다가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발견했을 때, 스트레스에 절어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선생님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대충 보니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웃기고, 슬프고, 설레이고, 너무 좋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부분이 몇몇 엿보이고(이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아샤에 대한 애정, 러시아 말을 못해서 오는 고립감, 러시아의 대단한 추위, 미술관, 영화관, 연극에 대한 감상, 장난감 가게로의 매일같은 출근, 무기력감 등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고,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꼭꼭 씹고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페이퍼도 몇번 썼었는데, 그렇게 쓰다가는 책 한권을 서재에 다 옮겨놓을 것만 같아서 자제했다. 

벤야민의 일생은 왜인지 무력한 지식인의 표상으로 박혀 있는데, [모스크바 일기]는 내가 상상하던 벤야민의 모습과 일치하는 동시에 리뷰 서두에서 언급했던 선생님의 모습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우울하고 약간 히스테리적이어서 무척 귀여운데다가 지적인 자극을 콕콕 주는 이 사람들. 벤야민의 말대로 우리는 그림이나 책, 영화 등 영감을 주는 대상에 감정이입하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담백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서 가장 알맞는 기억의 문을 찾아 '똑똑' 두들긴다. 대부분 다 읽고 반납했지만 소장할 예정이다.

+ 옮긴이의 말 중 로쟈님의 닉이 언급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 러시아에 대한 자문을 해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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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하 2009-12-0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당 번역자도 알라딘서재에 둥지(역자명으로 검색하면 나와요. 이미 알고 계시려나?^^;)를 틀고 계실 거에요. 이전에는 페이퍼를 가끔 올리셨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무력한 지식인의 매력이라 흠... 많이 삶에 대해 알수록 철저히 알수록 지식인이 되기도 하고 현실의 거대한 모습에 무력해지기도 하는 걸까요.

Forgettable. 2009-12-10 11:1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찾아봤더니 검은 바탕에 흰글씨라 읽기가 힘들;;
이시대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필요한 시대이긴 하죠 ㅎㅎ

새벽 2009-12-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우울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현실에 너무 짓눌려 버린 사람.
그래도 그 속에서도 참 값진 사유를 많이 해냈으니 대단한 사람이죠..

Forgettable. 2009-12-1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에게 벤야민 선집중 한권을 선물받아서 얼른 읽어보려구요. ^^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선집 1권 [일방통행로]를 읽고 기대보다 못해 실망 가운데 있었는데요...... 아포리즘은 잘 다가오지 않더라구요. 문학론과 비평이 좀 더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벤야민에 대한 전기를 먼저 접하니 기대감만 잔뜩 생기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의 인생이 드라마틱 하잖아요? 리뷰를 보니 [모스크바 일기]가 또 기대되는데요^^

Forgettable. 2010-04-08 18:0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님 서재에서 벤야민에 대한 실망을 엿보았어요. ㅎㅎㅎ
저는 선집중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아주아주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인데요 ㅎㅎ
어렵습니다..
전 어려운 책을 손에서 놓은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학생 때 그나마 있던 인내심이 아예 바닥난듯..
어쩌면 읽지도 않아놓고 읽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고요;

[모스크바 일기]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파고세운닥나무님한테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일방통행로]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