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청에서 매년 여름 대학생을 위해 하는 이벤트로 '내일路'라는 것이 있다.  

24살, 만 22살의 나는 당시 부산사는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힘겨워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주성치의 영화와 무한도전만 시청하다 자다가를 반복하며 피폐해져가고 있었고, 방학 내내 준비한 토익과 한자시험을 모두 망쳐버리고는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이별의 대응하는 방법중에 하나였고, 성격상 그러고 집에 처박혀있을 수도 없어서 동생을 데리곤 5만얼마짜리 내일로 티켓을 끊어서 여행길에 올랐다.  

경상도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여수->남원->곡성->전주->대전->제천->도계(-_-)->동해->강릉->증산->봉평->원주->서울의 순서로 기차를 타고 칙칙폭폭 수많은 도시들을 지났다. 너무너무 소중한 기억들이라 언젠가는 꺼내어 놓으려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너무 덥거나 추운 찜질방에서 한참을 잠못이루었던 건 낯선 곳이라는 불안감보다도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더운 날씨에 오동도와 돌산대교를 하루종일 오르내리며 지친 터라 찜질방의 얼음방에서 한시간 넘게 꽁꽁 얼었던 탓도 있겠고. 잠시 잠이들자마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향일암으로 가는 첫 버스에 올랐다. 괜히 알차게 여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무척 들떠있었는데, 그 땐 향일암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랬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수룩하게 새벽빛이 들기 시작했고 행여나 일출을 놓칠까봐 사람들을 따라 오르막길을 열심히 올랐다. 조금만 가면 저 위에 향일암이 있겠구나. 하는 얼척없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오르면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향일암에 대한 정보는    
1. 절이다. 
2. 일출이 멋있다.
3. 돌산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xx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이것 3개 뿐이었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평소 사전정보 없이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 뒷통수를 치기 위해 존재하듯이 그곳은 너무나도 가파르고 높은 절벽 위에 있었다는것을 난 2/3가량은 오른 후에야 깨달아버렸다. 매일 있는 일출따위 보려고 내가 이렇게 올라야 하나 후회와 회한을 몇십번씩 반복했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생각은 흐르는 땀에 씻겨져 나갔고, 동생과 나는 물론 주위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다들 그저 오르기만 했다. 울 것같은 마음으로, 아니 벌써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도 생각난다. 정상에 도착하기 직전, 왜 모든 산에서는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마지막 오름이 가장 힘든걸까, 라고 무거운 배낭을 움켜쥐고 한발 내딛던 순간을.



실컷 봐두었으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그 다짐은 2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난 너무나 당당하게도 향일암을 베스트여행지로 추천은 하되 내가 갈일은 없을거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내가 하하호호 신나게 노는동안 그곳은 설계도가 남았다는 핑계를 대며 사라져버렸다. 향일암, 대형 화재, 대웅전, 소실 로 이어지는 내 사진에 남겨진 댓글을 보면서도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건지 분명 텍스트를 읽었음에도 향일암이 없어졌단 걸 모르고 있었다.  

메인에 뜬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당황하고 어느새 젖은 목소리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는 동생에게 '야.. 향일암...' 이라고 했더니 동생이 환히 웃으며 '아..!!!! 좋지, 향일암' 하며 꿈꾸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이 일제 시대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왜 모든것들이 사라져가느냐며 화내는 동생에게 나역시 '그러니까.'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도 없는 우리에게 과거의 추억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  

그래도 '조금 더 많은 사진을 남겨둘걸, 한 번 더 가볼걸, 일정은 신경 끄고 조금 더 오래 머물며 나무냄새와 돌향기에 좀 더 취해있을걸,' 이깟 후회는 치워두고 그 자리에 그리움만 채워두어야 한다는 걸 안다. 향일암이 내게 그 사람과의 사진이나 못다한 약속,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말들에 대한 집착과 후회의 공간은 낭비일 뿐이라며 그 자리를 비워내고 따뜻한 추억만을 채워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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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흔적
    from 마지막 키스 2009-12-21 18:45 
    뽀게터블님.  추억에 관련된 시를 드릴까, 이별에 관련된 시는 너무 아프겠지, 하다가 골라낸 것이 '흔적' 이에요. 제 댓글은 이걸로.          흔적 &#
  2. 향일암을 추모함
    from 道를 아십니까 2009-12-21 19:53 
    할머니를 보내 드리느라 세상과 며칠 격리되어 있다 가까스로 다시 발을 들여놓은 어젯밤, '향일암 전소'라는 인터넷 기사 제목을 마주해 버렸다. 정황파악을 위해 기사를 클릭하기는 했지만 부러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내게는 낙산사 화재보다, 숭례문 전소보다 더 먹먹한 소식인지라 궁금한 게 많을 법도 하지만, 아마 오랫동안 기사를 정독하는 일은 없지 싶다.향일암 올라가는 길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험했었다. 변변한 계단도 없고 사람 하나 빠져 나가기가...
 
 
perky 2009-1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멋지고 글도 참 와닿아요. ^^
향일암에 화재났다는 거..이 글 읽고야 알게 됐어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Forgettable. 2009-12-21 14:10   좋아요 0 | URL
아침내내 우울해서 사진만 뒤지고 있네요. 왜이리 사진을 많이 찍어놓지 않았던건지 아쉬워요. 그래도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요 ^^

일출을 보며 감동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습니다. ㅎㅎ 진짜 마지막이었네요. 흑흑 ㅠㅠ

뷰리풀말미잘 2009-12-2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6년 전 쯤에 갔었는데 그때도 참 좋았어요. 절벽에 멋들어진 절간이 턱 걸터앉아 있고 먼 바다에서 해가 두둥- 하고 뜨니까 와 벌어진 턱이 다물어지지가 않더군요! 그때 찍은 사진은 하드가 소실되면서 사라졌구요 남은건 그녀가 찍었던 4*6사이즈 현상사진뿐이라 저는 자랑할 수도 없네요.

하지만 뽀님 추억은 불태워지는게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불타기 전에 만든 추억은 영원히 불타지 않아요.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불타기 전에 갔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Forgettable. 2009-12-21 15:25   좋아요 0 | URL
6년 전이라.. 갑자기 미잘님의 나이에 대한 확신이 혼란스러워지는군요. -_- 뭐 어릴 때도 여행은 다닐 수 있는거지만, 그녀와의 여행이라니, 중얼중얼.. (이 중얼중얼 버릇 누구한테 옮은거지)

제 추억은 괜찮아요.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땀으로 얼룩져 번들거리고 벌개진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곤 흠칫 놀랬던 기억도 아직 생생한걸요. 그런데 그냥 미처 그곳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아직 못가보셨는데 ㅠㅠ 여튼 그만 우울해해야지, 이거참 안그래도 예민한데;;

푸하 2009-12-21 16:54   좋아요 0 | URL
현상사진이라도 보고 싶군요. 안되면 스캔이라도...^^: 음 6년전이라... 두 분이 좋은 곳이라고(었다고) 하니 정말 아쉬워지는 군요.ㅠㅠ

푸하 2009-12-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헤어지게 되면 2/3지점에서 힘듦을 깨달을 만하면서 목적지가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야겠어요. 음... 근데 그런 곳은 미리 계획해서 가는 것이 불가능할 듯...ㅎㅎ~

Forgettable. 2009-12-22 09: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미리 계획해서, 완전 열심히 올라가 보리라 결심하고 갔다면 그 광경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겠지요, 너무 힘들어서 힘든줄도 모르는 데다가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던 터라 ㅎㅎ

다른 어느 문화재 소실보다도 더 마음이 안좋습니다.

머큐리 2009-12-2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보고 그냥 무덤덤했었는데...뽀님이 안타까워하니 다시 한 번 보게 되더라능~~
그래도 해는 계속 떠오르겠지요...흠

Forgettable. 2009-12-22 09:24   좋아요 0 | URL
많이 더울 때였는데 따뜻한 이미지로 남아있어요.
해는 계속 떠오를테고 그곳에서 보는 일출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위안삼고 있습니다.

2009-12-2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2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3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Demian 2009-12-22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 한 해는 불로 시작해 또 불로 끝나는군요. 도대체 무슨 아홉수(?!)가 이리 지독히도 끼었답니까. ㅠㅠ
개인적으로도 올 한 해는 정말 다사다난, 파란만장했답니다. 그래도 즐거운 성탄절, 따뜻한 연말보내시라고 인사하러 들어왔는데 주인 잃은 러브레터가 마음을 썰렁하게 하네요.ㅠㅠ

여튼 썽님~올 한 해 썽님과 썽님 블로그를 알게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놀러왔지만, 내년에도 우리 자주 만나요^^ㅎㅎ

우울함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연말 보내시길 바래요. 메리크리스마스!!! +_+!!!!!!!!

Forgettable. 2009-12-22 09:39   좋아요 0 | URL
데미안님, 요즘 블로그 뜸하시던데 오랜만이라 반가워요! ^^
아홉수만 넘기면 정말 괜찮아질지 모르겠어요. ㅠㅠ 정말, 아홉수라 이런 한해였던거면 좋겠어요.

저도 데미안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무지 행복했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요 ^^
크리스마스 신나게 보내세요!!

조선인 2009-12-2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겟터블님과 따우님 글을 읽으니 정말 가슴이 아파오네요.

Forgettable. 2009-12-22 09:40   좋아요 0 | URL
전 따우님 글 읽고 울뻔했지 뭡니까;;

순오기 2009-12-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향일암을 못 가봤는데 영원히 가볼수 없는 곳이 됐군요.ㅜ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도 없는 우리에게 과거의 추억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
공감의 쓰나미에요.

Forgettable. 2009-12-2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 아쉬움이 크실것 같아요. ㅠㅠ
재건축 한다해도 옛모습이 남지 않겠죠.

순오기님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