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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 (1, 2, 3권) ㅣ 문명텍스트 36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지음, 서정일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4월
평점 :
1.
20세기 영국에서 활동했던 소설가 E. M. 포스터의 대표작 『하워즈 엔드』(Howards End)는
한 마디로 ‘집’에 관한 소설이다. 제목인 ‘하워즈 엔드’부터가
집의 이름인데, 이 집의 주인인 윌콕스 부인은 소설의 주인공 마거릿 슐레겔이 임대인의 의사에 따라 30년 간 살아온 집을 나오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그건 추악한 일이에요, 슐레겔
양. 잘못된 일이고요. 슐레겔 양에게 그런 문제가 닥쳤다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자기 집과 헤어진다는
것,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는 것 ─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요. 그건 죽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에요. 저라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아, 너무 안타까워요!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죽지도 못한다면, 문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정말 가슴이 아파서......"
그러나 마거릿 슐레겔이
살았던 ‘위컴 플레이스’는 결국 재건축 때문에 헐리게 된다. 소설의 서술자는 위컴 플레이스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집들도 나름대로 죽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수세대의 인간들처럼 다양하다. 어떤 집은 비극적 울부짖음
속에 죽고, 어떤 집은 고요하게 죽어서 유령의 도시에서 내세의 삶을 산다. 반면에 다른 집들은 ―위컴 플레이스의 죽음이 그랬는데―몸이 소멸하기 전에 영혼이 먼저 빠져나간다. 그 집은 봄에 죽으면서, 두 자매를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흔들어 놓았고, 두 사람 모두 낯선 영역에 다가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9월이 되었을 때 그 집은 이미 아무 감정이 없는 시체였고, 30년
동안의 행복했던 기억도 죽은 집을 축복해 주지 못했다. 마지막 방까지 모두 비워내자, 마지막 이삿짐 차가 덜컹거리며 떠났다. 한 주인가 두 주 동안 집은
갑자기 속이 텅 비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서 있었다. 그런 뒤 무너졌다.
이 소설에서 집은
인간, 그것도 한 명 이상의 인간이다. 집은 사람의 기억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함으로써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길러낸다. 우리가 집을 꾸미기도 하지만, 집이 우리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부에
마거릿 슐레겔이 하워즈 엔드에서 동생 헬렌을 만나서 위컴 플레이스에 있었던 가구를 보면서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머니의 서랍장을 이런 데 두다니!” 헬렌이 소리쳤다.
“하지만 저 의자들을 봐.”
“정말! 위컴 플레이스는 북향이었지?”
“북서향이었지.”
“어쨌건 저 의자들이 햇볕을 쬐기는 30년 만일 거야. 등받이가
따뜻해.”
그러니까 포스터에
따르면 집이란 무릇 의자가 30년 만에 햇볕을 쬐어서 등받이가 따뜻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집은 ‘하워즈 엔드’보다는 ‘위컴 플레이스’와
같고, 아마도 그보다 훨씬 나쁠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평화로워지기에
우리 시대의 집은 비좁고, 거칠고, 무엇보다도 너무 비싸다. 윌콕스 부인의 순진한 경악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죽지도 못한다면, 문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2.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의 <문명 텍스트 총서> 제36권으로 출간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1∙2∙3권, 서정일 번역 및 주해)은
1486년 라틴어 초판본 ‘De Re Aedificatoria’를
기초로 한 조반니 올란디(Giovanni Orlandi)의 1966년
비판정본을 저본으로 삼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총 10권으로
구성된 텍스트 가운데 서문과 1∙2∙3권을 수록하고 있는데, 세 권을 모아서 먼저 낸 것은 자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내용적 근거가 있다. 알베르티 스스로 첫 세 권은 건축에 관한 일반적 사항을 다루고 나머지는
구별되는 사항을 다룬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 사항이라고 해서 전부 추상적인 내용인 것은
아니고, 예컨대 목재들 가운데 어떤 나무가 어떤 특징이 있고 석재들 중에는 어떤 돌이 어떤 특징이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알베르티가 말하는 일반적인 사항이란 건축에 관련하여 지역과 재료를 고르고
설계와 작업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이 책 『건축론』은 앞으로 번역될 나머지 분량의
서론 또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건축에 관한 한 아는 바가 거의 없고, 서양 고전에 관해서는 약간의 견문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커다란 건축물의 아름답고 견고한 구조가 주는 놀라움과, 가까이서 바라본 세부 구조 및
장식들이 지닌 우아함과 독특함이 주는 즐거움을 느낀 경험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딱딱하며 고풍스럽다고만
알려져 있는 옛 글의 작가들이 종종 보여주는 견실함과 자유로움, 경직되지 않은 단순함과 명료함을 좋아한다. 다행히도 알베르티는 독자에게 충분한 배려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장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상한 학술에 관심이 있는 뭇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2권 11장)다고 밝히며, 『건축론』이 소수의 전문가들을 위한 실용서에 그치지 않고 더 널리 읽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는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식상한 질문이지만 고전을 공부하는 이로서 항상 갖는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고전을 왜 읽는가? 5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사람이
쓴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건축론』에서 나는 뜻밖의 수확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의 건축사적 의미나 기타 전문적인 내용을 평하고 감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단지 내가 이 책에서 배우고 느낀 것에 대해서만 쓰고자 한다.
3. ‘도상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이론 체계를 제시하여 미술사학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한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고딕 건축과 스콜라철학』에서 흥미로운 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이른바 ‘심적 습성’의
이론으로서, 한 시대에 등장하고 발전하는 다양한 문화 현상들의 유비를 가능하게 하는 그 시대 고유의
심리적 원리 또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도상해석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적 의미’와 상응하는 것이며, 부르디외가
이 책을 번역하면서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착상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고딕 건축과 스콜라철학』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심적 습성’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파노프스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a)으로
대표되는 ‘대전’(summa)의 형식과 고딕 건축의 양식의
상응에서 발견하는 중세 후기의 ‘심적 습성’은 부분들의 구별과
체계적 배열을 통한 총체성과 조화의 지향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의 진정한 중세적 특성은 총체성과 조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는 고유의 방식에 있다. 파노프스키는 로저 베이컨을 인용하여 스콜라철학의
기원적 요소를 다음의 세 가지로 밝힌다. “변증론자들이 행하는 바, 수많은
부분들로의 구분. 문법학자들이 행하는 바, 리듬의 일치. 법학자들이 행하는 바, 강제적 조화.”(김율 옮김, 54쪽)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중세의 이성은 자기 규제적이다. 왜냐하면 이미 진리는 신앙에 의하여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역할은 신앙에 의하여 제기되는 의심과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하여, 마치 법관들이 그렇게 하듯, 완전히 종결시키는 데에 있다. 스콜라 철학의 서술 체계는 이처럼
이성 자신의 한계를 명백히 자각하고서 자신의 역할을 “명료화를 위한 명료화의 요청”(28쪽)에 종속시키는 태도에 기원한다. 파노프스키의 문장을 옮긴다.
명백하게
함(manifestatio), 그러니까 해명 또는 명료화야말로 내가 초기와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첫번째
규제 원리(first controlling principle)라고 부르고 싶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가 가능한 최고도의 수준─이성에 의한 신앙의 해명─에서 작용하기 위해서, 그 원리는 이성 그 자체에 적용되어야 했다. 만일 계시의 영역과 분리되어 자기 한계 안에서 완결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사유 체계에 의해 신앙이 '명백해져야' 한다면, 우선
사유 체계 자체의 완결성, 자기 충족성, 한계가 '명백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문헌 서술의 도식(a schema of literary presentation)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추론이 신앙의 본성 그 자체를 지성에게 해명해준다는 사태와 똑같이, 문헌 서술은 추론의 그 과정을 독자의 상상력에게 해명해주려 한다. 숱한
조소를 받는 스콜라철학 저술의 도식주의와 형식주의는 이로부터 생겨났다. (김율 옮김, 25쪽)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전성기의 고딕 대성당이 지향한 바가 이와
같다. 그것은 ‘전체성’을
목표로 하며, 모든 부분들이 명료하게 드러나면서도 전체의 조화에 남김 없이 기여함으로써 전체가 완벽한
종합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파노프스키는 중세 고딕 건축이 보여주는 고유한 건축 요소들과 그것을
종합하는 기교들을 자세하게 분석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서술 체계와의 상응을 논증한다. 그리고 철학과
철학적 문헌의 서술 그리고 건축이라는 상이한 문화 현상들의 ‘동시 전개’를 가능하게 했을 심리적 기원, 시대와 조응하여 그것에 응답하기도
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심적 습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나는 이러한 ‘심적
습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알베르티의 『건축론』을 읽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이미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르네상스인’의 전형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성직자이자 외교관이었고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긴 인문학자”(역자 해제)였고, 세속적
영역과 학예의 영역 모두에서 지대한 성공을 거두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타타르키비츠는 그가 대학에서
법학 교육을 받았지만 당대 이탈리아 인문주의를 이끌었던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 또한 이수했으며, 광학과 해부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전한다. 또한 플라톤을 알았지만 플라톤의 철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사변적이고 종종 신비롭게 느껴지는 문제보다 실질적이고 유용한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는 실용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나는 다 빈치보다는 알베르티가 오히려 ‘르네상스인’의 전범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무엇보다도
그리스와 라틴 문화의 ‘재탄생’을 기조로 하고 있으며 그
출발과 확산에 14세기 이탈리아 대학의 인문주의 교육(위에서
언급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 학제가 바로 이것이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알베르티는 그러한 교육 제도와 문화 정책의
수혜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학이 아니라 장인의 공방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알베르티가 고전에 능통하여 저술 곳곳에서 고전을 인용하고 루키아노스에 관한 그의
저술이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였다면, 다 빈치는 마흔이 넘어서 원전을 필사하며 라틴어를 독학했다.
두 사람 모두 세속적 명성을 누렸지만, 지금 우리에게 ‘선구적’이라는
칭송을 받는 발명가 다 빈치의 여러 아이디어는 종종 외면 받은 반면, 알베르티는 후원자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자신의 미학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는 데에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티는 『건축론』에서
“그 수행에 있어서 불완전한 것으로 인해 그대에게 결핍을 남길 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후대의 무관심 혹은 거주자의 홀대 때문에 이내 망가지게
된다면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2권 2장). 다 빈치는 암호로 일기를 쓰는 등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는 한탄의 말을 남기고 죽었다. 알베르티는 차분하고 만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두 인물을 비교한 것은 누가 더 낫다고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에게서 천재의 상이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문과 예술에 관해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관심이라는 르네상스적 인간의 특징을 공유하지만, 다 빈치는
직관적인 천재성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독학하면서 자기 시대에 속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 반면, 알베르티의
천재성은 절제와 세련됨을 갖추고 있어서 진정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여 그 시대와 흐름을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알베르티가 아니라
다 빈치인 것은 한편으로는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건축론』은 ‘르네상스인’ 알베르티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저작이다. 알베르티는
이 저작에서 건축가로서 정체성과 경력을 드러내고, 학자로서 학술의 가치에 관한 진지한 신념과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성실함을 보여주고, 작가로서 자신의 저작이 유용하고도 즐겁게 두루 읽힐 수 있는 견고한
품격과 자유로운 매력을 부여하며, 고전에 능통한 인문주의자로서 다양한 고전 작가를 인용하는 박식을 입증하면서도, 고전을 답습하고 추종하는 대신 자기 시대에 속한 르네상스인으로서 기꺼이 고전을 비판하고 수정함으로써 고전의
‘재탄생’에 기여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는가? 이제 『건축론』의 내용을 들여다볼 차례이다.
4. 알베르티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어떤 학술들은 필요성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고, 어떤 것들은
유용성 때문에 인정하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앎으로써 큰 매력을 느끼기에 값지다. 이 학술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좇아가 보지 않아도 될 만치 분명하다. 그대가
되짚어 보면, 무릇 가장 중요한 학술들의 범위에서, 나머지
것들과 떨어져 각별한 목적을 추구하고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데 동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유용성을 매력과 품위와 한데 묶는 어떤 것을 마침내 찾아낸다면, 내 생각에 그 범위에서 건축이 뒤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즉, 곰곰히 생각해보면 건축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편의성이 크고 인류에게 아주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품위에서도
으뜸가는 학술들 가운데 뒤지지 않는다.
요컨대 건축은 하나의 학술(ars)으로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유용한 것을 고안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필요성과 유용성의 차이가
다소 모호해 보일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예컨대 물을 담기 위한 항아리를 만든다고
할 때, 항아리의 손잡이가 없어도 물을 담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 자체는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항아리에 손잡이를 붙인다면 물을 담은 항아리를 나르는 데에 더 편리할 것이다. 이처럼 당장 필요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필요성의 제공이라면, 그러한
요구를 보다 세심하게 고려하여 수월하게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유용성의 제공이다.
역자 해제에서 언급하듯, 알베르티는
『건축론』의 체계를 이러한 세 가지 원리에 맞추어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1권에서 3권까지는 건축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모든 건축물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항들을 다룬다면, 4권과 5권은 각각의 쓰임에
부응하는 건축물이 어떤 방식으로 기본 요소들을 수정하거나 추가 요소들을 더하는지를 논하며, 6권에서
9권까지는 각기 다른 유형의 건축물에 적용되는 장식 요소들을 소개한다.
10권은 건축물에 생겨나는 결함을 어떻게 복구하는지에 관한 논의이므로 건축물을 짓는 단계가 아니라 짓고 난 이후의 단계이므로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알베르티는 서문에서 밝힌 학술의 원리에 따라서 『건축론』을 전개한다.
그런데 필요성, 유용성, 매력이라는 세 가지 원리가 단지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반 ‘학술’들의 원리라면, 우리는 『건축론』이 그 자체 하나의 ‘건축물’로서 동일한 원리를 지니고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1권 9장에서
말한다. “짓는 것의 모든 원리는, 그대가 제대로 내다봤다면, 필요성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을 편의성이 키웠고, 쓰임새가 꾸몄고, 결국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되었다. 다만 매력 자체가 부적절한 그 어떤 것도 떨쳐 낸다면 말이다. 따라서
건축물 안에 이미 있는 지체들보다 더 많은 지체들을 요청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이미 있는 지체는 어떤
부분에서도 흠 잡히지 않아야 한다.”
『건축론』은 그 자체로 『건축론』에 제시되어 있는 건축의 원리를
적용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알베르티는 자칫 장황하거나 지나치게 어렵게 될 위험을 경계하면서, “되도록
명확하고 쉽고 효율적으로 다루고자 하므로, 우리는 관습에 따라 설명하겠다”고 말한다(1권 1장). ‘관습에 따라’라는 말은 썩 분명하진 않지만, 이어지는 문장을 참고할 수 있다. “즉, 말하는 내용들의 원천이 열려 있어야만 다른 말들이 더 술술 풀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알베르티는 건축에 관한 제반 논의를 제공하는 필요성의 영역을 넘어서, 그것들을
가능한 한 명확하고 쉽고 효율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유용성을 위해 ‘말하는 내용들의 원천’을 밝히고자 한다.
알베르티가 말하는 ‘말하는
내용들의 원천’이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고전’과 같다고 보인다. 알베르티는 여러 장(章)에서 ‘옛사람들’의 학설이나 고전 작가들의 언급을 전한다. 특히 본격적인 건축론에
들어가기 앞서 알베르티는 1권 2장에서 6장까지 어떠한 지역에 터를 잡고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지를 논한다. 여기서
플라톤, 오비디우스, 바로를 비롯한 실로 다양한 고전 작가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다른 한편으로 알베르티는 자신이 조사한 고대의 건축물을 직접 사례로서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 목적은 단지 찬양만을 위한 것은 아니어서, 예컨대 1권 10장에서는 “나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아주 큰 잘못을 찾아냈”다면서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를 짧게
언급하기도 한다. 이미 보았듯이 알베르티에게 고전이란 수용과 재창조를 통한 ‘재탄생’의 대상인 것이다.
7장부터 알베르티는 1권의
주요 내용인 ‘리네아멘타’의 각 요소들을 설명한다. ‘리네아멘타’라는 어휘에 관하여 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달려 있는데, 대략 ‘도안’ 내지는
‘디자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말하자면 재료를 고르고 실제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어떻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구성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단계이다. 리네아멘타의 각 요소는 바닥, 구획, 기둥과 벽, 지붕, 개구부, 계단, 굴뚝과 배수로 등으로, 알베르티는
『건축론』의 전체 체계와 마찬가지로 리네아멘타를 다루는 한 권 내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가장 세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순서를 따르고 있다. 재료에 관련된 예산을 산정하며 직접 재료를 관찰하고 선별하는 것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2권, 실제 작업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3권 또한 세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작업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자신이 건축물이란 무릇 “지체들끼리 서로 맞아떨어져서 전반적인
조화가 전체 작업의 명예와 매력에 이바지하게끔 구성 또는 조합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는 바, 『건축론』 또한 명료함은 물론 아름다움을 위해서 조화로운 체계의 구성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축론』의 매력은 무엇인가? 알베르티가 스스로 밝히는 것은 “흥미로운 일화들을 여기저기 섞어
놓는 재미”이다. 한 예로 알베르토가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꽤 흥미롭게 들린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 때, 라티움 채석장서 작업자들에 의해, 주변에 숨 쉴 통로가 완전히 막힌
거대한 돌덩어리 안에서 뱀이 발견되어 나왔다. 개구리와 또한 마찬가지로 게도 몇 마리 발견되었는데, 하지만 이것들은 죽어 있었다. 또한 나는 이 시대에 순백색 대리석
조각 안에 잎이 세 장 들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화석에 관한 진귀한 역사적 언급인데, 꽃의 모양이 새겨진 화석에 관한 알베르티의 ‘해석’은 더욱 즐겁다.
베로나의
전원에는 양지꽃들이 표시된 돌들이 너른 들판에 퍼져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이다.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그것들의 선이 정확하고 균일하고, 자연이 비범하고 완벽한 솜씨로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어 놓아서, 그
작업의 미세함을 누구도 도저히 모방할 수 없다. 더 놀랍게도, 거기
새겨진 표시를 보호라려는 듯이, 이 돌들 중 어느 하나도 위로 면한 것이 없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더러 경탄하라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연 자신을 위해서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축에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들의 열거 또한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준다. 예컨대 알베르티는 목재에
관하여 언급한 작가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비트루비우스는 목재를 초가을에서부터 서풍이 불기
전까지의 기간에 벨 것을 선호했다. 헤시오도스는 말하길, 머리
위에 떠 있는 태양이 많은 열기를 뿜고 사람들을 검게 그을리게 할 때 수확을 하되, 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나무를 베라고 한다. 이에 대한 카토의 조언은 이렇다. 즉, “목재는 특히 그것이 참나무면 하지가 되면 베라. 겨울에는 이미
분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목재들은 씨 있는 것은 다 자랐을 때 베고, 씨 없는 것은 원하는 대로 베라. 씨가 녹색이고 익은 것은 씨가
떨어질 때 베고, 느릅나무는 잎이 떨어질 때 베라.”
알베르티가 믿음직한 사항들만 전하는 것은 아니며, 본인의 논평을 전혀 덧붙이지 않아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도 있다. “또한
어떤 달 아래 쇠로 된 연장을 쓸지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작가들뿐 아니라
또한 특히 바로는, 이런 일에서 달이 쇠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서 달이 기울 때 머리카락을 자르는 사람은
곧바로 대머리가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 까닭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날을 받아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나는 그가 즐거움을 위해 이 문장을 썼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돌의 종류와 특성에 관한 문장은 시적인 정취마저 있다. 다소 길지만 옮겨보겠다.
흰색
돌이 어두운 색 돌보다 다루기 더 쉽다. 투명한 돌이 불투명한 돌보다 더 무르다. 모래에 더 닮아 있을수록 그 돌은 다루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반짝이는
모래가 흩뿌려져 있으면 돌이 우둘투둘하고, 금가루가 나 있으면 끄떡없다. 검정자국이 이를 테면 얼룩덜룩하면 그 돌은 다룰 수 없다. 모난
반점이 흩어져 있는 돌은 둥근 반점이 있는 돌보다 더 단단할 것이다. 또한 반점들이 작을수록 그 돌은
무게를 더 잘 견딜 것이다. 또한 그 색이 순수하고 맑을수록 그 돌은 더 오래갈 것이다. 또한 돌에 결이 적다면 그 돌은 더 온전할 것이다. 또한 결의 색이
돌의 색에 일치할수록, 그 돌은 더 균질할 것이다. 결이
더 가늘수록 돌이 더 제멋대로일 것이다. 그것이 비틀려 있고 구불구불할수록 더 까다로울 것이다. 마디가 더 많을수록 더 거칠 것이다. 가장 쪼개지기 쉬운 결은 그
중간에 있는 붉은색 또는 부식된 황토색의 줄이 지나는 것이다. 바로 그 다음은 옅고 색 바랜 풀 색깔이
곳곳에 있는 결들일 것이다.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얼음의 푸르스름함을 닮은 것들이다. 많은 결들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쪼개지기 쉽고 항상성이 없음을 가리킨다. 또한
결들이 곧을수록 덜 믿을 만하다.
알베르티가 이러한 문장을 쓴 것은 물론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 내용이 지금에 와서 얼마나 유용성을 가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때로는 경탄하게까지 하는 까닭은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그 시선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는 고전이 갖는 큰 매력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문장을 읽으며 단지 그 내용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받아들인다. 이러한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치기만 했던 나무와 돌의 색과 질감과 결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즐거움을.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그 내용을 기록한 문장만 읽어도 그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다. 건축물의 세부 장식들이 그 자체로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체의 아름다움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굉장한 만족을 줄 수 있듯이 말이다. 『건축론』에는 그러한 문장들이 실로
가득하며, 그것들이 이루는 조화와 체계는 파노프스키가 『신학 대전』과 고딕 건축물에서 발견했던 그러한
‘강제적 조화’와는 다르다.
그것은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허용하는, 심지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조화이기 때문이다. 『건축론』의 서술이 견고하고 체계적이면서도 결코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자유롭고 활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활기찬 견고함을 알베르티가 설계한 건축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알베르티가 설계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정면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1층에 길이가 짧은 2층을 올리고 그 위에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놓아서 안정감과 화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한편, 2층 건물 양 옆으로 붙인 곡선의 장식은 건물 전체의 인상에 활기와 생명력을 부여한다. 정면의 외관 또한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1층 개구부의
아치를 높이고, 2층은 원형 창문을 놓는 등 경쾌한 변주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웅장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고, 안정감 있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알베르티의 『건축론』이, 그리고 알베르티라는 인물이 주는 인상이
이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의 『건축론』이 어떻게 하나의 ‘건축물’로서 학술적 필요성에 부응함은 물론 명확함을 통한 편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부드러운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이 정도의 소개로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알베르티의 『건축론』을 읽고자 하는 역자의 제언에 도움을 받아 『건축론』이 갖는 의의를 말하고자
한다.
5. 알베르티는 서문에서 건축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는 확실하고 경탄할 만한 원리와 방법으로써 또한 정신과 영혼으로써 한정하는 법과 작업에 의해 완성하는 법을
체득하여, 무엇이든지 무게의 움직임으로부터, 물체들을 결합하고
뭉침으로써, 사람들의 고상한 쓰임새에 아주 잘 부합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서문) 건축가의 정의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임무는 막중하다. 건축가는 일상적인 삶의 필요에 부합하는 시설과 도구를 설계할 뿐만 아니라(알베르티는
비트루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시계 제작을 건축가의 일로 규정하고 있다), 종교 의식을 위한 신전과 성소를
세우며, 강의 흐름을 바꾸고 항구와 다리를 지어서 영토를 넓히고 더 넓은 세계로 통하는 길을 낸다. 이처럼 건축가는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터주는가 하면, 투석기와 요새를
만들어서 조국의 안전과 도시의 평화를 지키기도 한다. 그리고 크레타 섬이 유피테르의 무덤으로, 델로스가 신전으로, 로마 제국이 그들의 장엄한 건축물로 유명하였듯이
건축가는 조국의 승리를 기념하고 명성과 권위를 널리 전하기 위한 기념물을 세운다.
알베르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결국 공화국의 안전과 품위와 명예는 건축가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우리의
기쁨, 즐거움, 건강, 쉴
때나 일할 때 혜택을 입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그의 덕분이고, 요약컨대 우리가 위험 없이 품위 있게
사는 것이 그의 덕분이다. 따라서 작업의 즐거움과 경이로운 매력으로부터, 필요성으로부터, 발명품의 도움으로부터, 훗날의 열매로부터, 우리는 그를 인정하고 경애하고, 인류로부터 명예와 존중을 받을 가장 합당한 사람들 중에 두어야 함을 부정하지 않는다.”(서문) 이 점에서, 역자가
해제에서 제안하듯, 알베르티의 『건축론』은 문명사적 맥락에서 르네상스적 도시 문명의 이상과 기획을 보여주는
저작이기도 하다. 알베르티 그 자신도 말하듯이, “만일 도시가
철학자들의 생각대로 큰 집이고 반대로 집 자체는 작은 도시라면, 이것들 자체의 작은 부분들을 왜 작은
집들로 아니 여기겠는가?”(1권 9장) 집의 각각 부분들이 작은 집이듯이, 각각의 집은 도시의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도시의 각 부분들은 『건축론』의 원리에 부합하게, 유용하고도 매력적으로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알베르티의
『건축론』은 이른바 ‘도시계획’에 관한 고전 텍스트로 읽을
수 있고, 알베르티가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또 『건축론』이라는 저작을 통해서 실현한 르네상스적 이상은
당대 알베르티 자신이 살아가던 도시 문명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적 인간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해도, 르네상스 시대가 정말로 이상적인 세계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알베르티가
활동했던 15세기 이탈리아는 물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번영했지만,
언제나 도시의 팽창과 부의 증대는 권력 투쟁의 피비린내와 부정부패의 악취를 남기며, 그
속에서 빈곤으로 떠밀린 사람들은 고통으로 신음하게 마련이다. 특히 알베르티는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파괴와 재개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고대 신전과 극장들이 모범으로 남아있어서
많은 점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가 되고 있지만, 슬프게도, 이
건물들은 매일 더 망가지고 있고 (...) 건설자들은 오늘날의 부조리함에서 영감 받을 뿐, 인정되고 더 선호된 방법에서는 영감을 받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우리 삶과 앎의 결과가 다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 못할 일”이라고 쓰고 있다(『건축론』6권 1장, 서정일 2014, 58쪽에서 재인용).
알베르티가 회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던 도시의 풍경은 우리의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김현옥이 각종
준공식에서 준공 테이프를 자른 가위들로 시장 집무실의 벽을 사방으로 빽빽하게 채워놓았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정지돈의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문장으로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소설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다큐인지가 도대체 모호해서 아마도 픽션이겠거니 넘어갔던 것을 그제서야 사실이라 알았던 것이다.
정지돈은 인터뷰의 형식을 빌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김현옥 시장은 또한 기공식 마니아였습니다. 그가 있을 당시 어울은 천지가 공사판이었는데 그는 하루에도 기공식을 세 탕씩 뛰는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줬지요. 게다가 그는 준공 테이프 페티시가 있어 자신이 직접 자른 준공테이프는 꼭 집무실 벽에 걸어뒀습니다. 그건 성황당에 걸린 비단처럼 보며 결재를 받으러 들어갈 때면 점을 보러 가는 기분이 들곤 했지요.”
서울시와 성황당, 도시와
종교. 이 문장은 알베르티의 문장과 기묘한 조응을 이룬다. “어떤
사람들은 별의 운행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삼사백 년 전 대단한 종교적 열정이
일어나서 인간의 탄생목적이 오로지 종교건물을 짓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세어보니 로마에는 2천5백 채가 넘는 종교건물이 있고,
그 절반 이상이 폐허 상태다. 눈앞을 보라. 이탈리아가
온통 경쟁적으로 새로 지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전부 목조로 지어졌던 도시들이 이제는
얼마나 많이 대리석으로 바뀌었는가?” (『건축론』6권 1장, 서정일 2014, 58쪽에서
재인용).
물론 도시는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들과 돈이 나고 드는데 변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흐름이 어떤
사람들을 빈곤과 고통으로 몰아내며, 어떤 사람들이 부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탐욕을 추구하는 일을 보아넘긴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정일(2014)에
따르면 알베르티의 이상은 단지 고대 도시의 복원이 아니었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종교 건물들에 관한 비판적 시선을 읽을 수 있듯이, 알베르티는 고대의 도시가 결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미신에 관한 알베르티의 비판은 2권 13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인문주의자로서 ‘미덕’(virtus)이라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고대의 도시와 건축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새로운 이상적 도시를 기획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획에서 알베르티는 유용성과 매력의 조화라는 제원칙을 견지하였다. 이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건축론』이라는 저작뿐 아니라 알베르티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티의 『건축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그러한
총체성의 구현에 있다. 그리고 이는, 알베르티가 플라톤과
키케로처럼 정말로 고전의 작가가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우리보다 자유롭게, 고전의 작가들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값지다. 그것은 고전이 당대 사람들에게 행사했던 영향력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그 이후에 발휘했던 영향력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베르티에게 한 가지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말하자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고전을 읽는 일이 우리에게 ‘총체성의 복원’으로 다가오는지. 알베르티의 『건축론』은 그 자체로도 고전이지만, ‘고전의 활용’으로서도 훌륭한 안내서이다. 포스터와 알베르티가 말하는 바, 집와 도시와 문명이란 결국 터를 잡고 틀을 닦고 벽을 쌓고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얹어서
살림을 들이고 햇빛을 쬐면서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고전을 읽고 배우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