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B.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또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고뇌하고 힘들어하며 헛된 시도를 반복한다. 그 상처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무언가 의미 없는 보상을 원한다. 치유되지 못한 외로움을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채......


1. A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구체적으로 작가가 보고 있는 호퍼의 그림을) 모르는 독자가 문제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도대체 그 그림이 황량한지 황당한지 알게 뭔가.
B 역시 혼자 심각하고 혼자 비장한, 혼자만의 잔치인 자기 고백이라 3자가 딱히 끼어들 틈이 없다.

2. A는 알랭 드 보통의『동물원에 가기』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단이고,
B는 배우 최민수 아저씨가 바이크 불법 개조 사건 직후 모 언론사에 보낸 전문中 시작 부분이다.

3. 보통은 20여 개의 언어로 출판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부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최민수 아저씨는 앙드레 김 못지않은 화려한 어록으로 세간에 웃음을 주고 있는 이 시대의 터프가이다.

4. 보통(Botton)은 내게 명백한 최고의 수면제다.『행복의 건축』은 신작 출판기념으로 그의 책 세 권을 덤으로 주는 행사 때 고민에 고민 끝에(나는 이미『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질린 경험이 있다) 예약하고 받은 책이다. 지금도 건축 공부를 해볼까 고민할 만큼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내게 건축 에세이는 뿌리치기엔 너무나 유혹적이었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행복의 건축』을 읽다가 불과 서너 페이지쯤 넘겼을 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낮잠을 자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작가 소개) 30대 후반의 이 아저씨는 어찌하여 매번 나를 이렇게 잠을 재우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녁에 보통의 네 권의 책 중 가장 얇은, 그 제목도 참 가벼운『동물원에 가기』를 집어 들었던 것은 책의 무게보다 내 이해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라고 반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두께는 얇지만 그 내용은 어찌 그렇게 천근만근인지. 겨우 첫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사정없이 감겨드는 눈을 부릅뜨고  읽고, 소리내어도 읽어 봤지만 결국 "그래요, 제가 졌어요." 항복의 흰 깃발을 들었다.

5. 보통의 문장과 최민수의 문장은 도대체 뭐가 다른가. 내 보기엔 현학적인 우물의 깊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제대로「같기도」인데. 그런데도 한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세간의 웃음 거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불공평하다.
소쉬르는 언어를 (1)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그 사회에서 공인된 상태로의 언어인 랑그(langue)와 (2)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의 구체적인 언어를 의미하는 파롤(parole)로 이원화했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를 머릿속에 있는 개념과, 소리가 되어 입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로 구분한 것인데 위의 두 경우를 보면 어떤 언어를 쓰는가가 아니라 언어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것 같으니 그런 구분이야 아무렴 어떤가 싶다. 

예전에 우리들 사이에 유행했던 우스개 소리에 이런 게 있었다. 공부 잘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잘하는 놈이 노는 것도 잘 논다"하고, 공부 못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못하는 놈이 놀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아, 현실은 이렇게 비정한 것이다. 

6. 언제던가 보통의 저서가 스테디셀러로 진입했다는 자료를 봤다. (물론 자료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발견했을 때보다는 덜 경악했지만)
도대체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산만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원래 맨 얼굴에 자신 없는 사람의 화장이 두꺼워지기 마련이지, 였다. 내가 읽은 보통은 그랬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덧붙이고 덧붙이고... 지나치게 말이 많다. 그나마도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학적이고 중언부언이다. 원래 지식이란 누구나 알기 쉽고 간단한 것이어야 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태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꿈 해석'이 궁금하면 직접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보자.
저자 A는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고 연구한 사람이다. A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이론에 관한 책을 썼다. 독자B는 A의 저서를 읽는다. 그럼 B는 프로이트를 읽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B는 A의 프로이트를 읽은 것이다. B가 누군가에게 프로이트 얘기를 한다면 그건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트의 사촌쯤 되는 인물일 터다.
'철학의 문학적 대중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오히려 철학이라는 강박을 거세하고 소설로만 읽는다면 충분히 소설적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보통의 소설을 읽고 철학은 이런 거야, 라고 말 할 사람도 없겠지만 연애 심리를 철학적 관점(혹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놓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보다 E.프롬의『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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