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하면 '연애' 소설은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없다. 연애 소설들의 작품성이 떨어져가 아니라 그냥 읽고 나면 그런가보다 싶은게... 감성이 바닥을 쳐서 마이너스로 치닫는 자의 증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말하고 싶은 건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내가 자극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거다.
근데. 이 책은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울렁거리게 하고 기억나게 한다. 엄청나게 애절한 사랑이라든가, 대단히 아름다운 서사가 있다거나, 상상 이상의 에피소드들이 있는 게 아닌데... 그냥 사십대 즈음에 만난 남녀가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서로를 마음에 간직하며 이메일과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다시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주파수가 꼭 맞는 상대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사랑을 이루려 했으나 그게 그렇게 안되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
우연히도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만났고, 그래서 그 시기를 어쩌면 견디어 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또 그것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다른 사람이 개입되고... 그러나 헤어진 이후에도 간혹 간혹 서로를 그리워하는... 어른의 사랑 이야기이다. 현실감이 담뿍 들어갔으면서도, 그러니까 이라크 내전이라든가 미국의 금융 위기라든가 이런 이야기들이 어색하지 않게 잘 들어갔으면서도, 아련한 사랑의 감정들이 과하지 않게 잘 묘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주인공 남자의 직업이 클래식 기타리스트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음악이 있고 히라노 게이치로 특유의 섬세한 음악에 대한 묘사가 한 몫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주인공 여자의 아버지가 영화감독이는 것도 더하여 낭만적인 감각들을 잃지 않는다. 만약 사랑이라는 게, 현실에서, 중년에 이루어진다면 아마 이런 감성, 이런 대화, 이런 추억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도 함께 들면서 말이다.
요코는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자고 마음먹었다. 인간에게 결단을 재촉하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후회가 찾아오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일 텐데도 이미 그녀의 발밑은 그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마냥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마키노가 했던 말을 요코는 자기 자신의 언어로 수없이 되뇌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고미네 요코라는 인간 또한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이라고. (p189)
누군가와 마음에 공명을 이룬다면, 이런 결심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차서 자신에게 잘 해주는, 그리고 자기도 좋아하는 사람과 약혼을 했지만, 진정 나를 이해하고 내가 그일 수 있고 그가 나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면 아마 어렵겠지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을까.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음에도, 그가 없는 나는 '비현실'이라고, 나이가 들면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뚜렷해지기 때문에, 두려우면서도 그 '비현실'을 벗어날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행복이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이 세계의 표면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p198)
그래. 행복을 너절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그런 사람을 가지는 것이 행복이다. 요코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고 마키노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곧장 뻗어나간 철도의 선로는 저 멀리의 소실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을 하나둘 지나가도 풍경은 여전히 똑같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평행하는 두 줄기 레일은 결코 교차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보기에는 언젠가 반드시 하나가 될 것 같은 그 점은 말하자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p214)
슬픈 예감은 왜 늘 맞아들어가는 것인지. 이 소실점에 대한 구절에서... 무릎을 친다. 될 거라고, 만날 거라고 수없이 되뇌는 관계, 한 치 앞도 못 보는 인간들은 그렇게 될 거라고, 지금처럼 살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교차하지 않는 레일. 환상에 불과한 소실점.
마지막 장면은, 참 아름다왔다. 열린 결말이라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충분히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이 퇴색하지 않았음을, 그 떨림이 여전함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처음 만나 5년 반의 세월 이후 다른 위치에 선 상태로 재회하는 마키노와 요코. 아마, 이 더운 여름날, 두고두고 생각날 장면이고 책이 아닌가 싶다.
*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들을 좀 더 찾아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던>인데, 여러 책들이 번역되어 나와 있었다. 와. 이렇게나 많이 번역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일식>과 <달>을 보관리스트에 슬쩍 담아본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다. 조만간 사서 줄기차게 읽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