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비가 온다.
원래는 비가 오는 걸 너무너무 싫어하는데 (머리가 곱슬이고 힘이 없어서 비오고 습하면 머리가 구불구불해지면서 축 늘어진다) 오늘은 비가 반갑다. 가물어서 다들 걱정이고, 정말 가물다 느낄 정도였으니까. 근데 요즘엔 비가 좌락좌락 내리는 날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다. 장마도 없어진 것 같고, 부슬부슬 떨어지다가 그치니. 이걸 비라고 해야 하나. 옛날같은 비가 문득 그리워진다. 도로에 물이 막 넘쳐나서 신발이 다 젖고 그랬었는데. 흠. 이건 하수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인건가? 허허.
5일날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흘이나 놀았는데, 출근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뭘 했는 지 모르겠는 거다. 도대체 뭘 했지? 뭘 했지? 사실 책도 많이 안 봤고... 아 요즘 정말 집중력 완전 떨어져서 도대체가 책 진도가 안 나간다고 다시한번 투덜.
하루는 조카랑 엄마랑 <원더우먼>을 봤다. 조카가 재량휴일을 받았는데, 동생네가 조카를 우리집에 투척. 나의 휴가랑 겹치는 바람에 그래, 그럼 영화나 보러가자 해서 간 거였다. <캐러비안..> 볼래? <원더우먼> 볼래? 했더니 <원더우먼> 해서 갔고. 조카와 엄마 함께 영화보고 점심먹고 한 건 좋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기분전환도 되었고. 조카가 이제 다 커서 - 세상에. 벌써 중1이다 - 말도 좀 통하고.. 아직 사춘기는 안 왔는 지 남자애가 수다가 엄청나서... 야. 입좀 다물어 해도 계속 조잘조잘. 조카라 그런 지 그 모습이 그저 귀엽기만 한 건... 콩깍지 씌워진 고모의 모습.
<원더우먼>은 재미있었다. 그닥 기대하지 않았던 거에 비하면.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처음엔 좀 지루했고 중간부터 흥미진진해졌는데, 마지막에 가서 김 빠지는 결말이라 그렇긴 했지만, 파워풀한 원더우먼의 모습은 반가왔다. 예전에 미드로 나왔었던 그 원더우먼은 예쁘장하고 뭔가 여성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느낌이었다면, 이번 원더우먼은 '투사'였다. 아 저런 캐릭터, 옆에 있으면 든든하겠어. 이런 느낌이 쫘악 전해지는?
근데 우습게도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상대역인 크리스 파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단 크리스 파인이 좀 멋졌었고.. 스타트랙부터 눈여겨 봤었는데, 흠. 멋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때의 그 눈빛. 버튼을 누르기 전 살짝 망설이던 그 손동작. 그걸 보면서, 아 대의란 무엇이고 산다는 건 무엇이냐. 아마도 다음날이 현충일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 존재는, 대의 앞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존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목숨을 바친다는 것, 사실 너무 무섭고 끔찍한데, 그걸 버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에게 국가적인 보상과 명예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이든, 그게 아니든. 아마 현충일 대통령의 추념사도 그런 내용이 아니었는가 싶다...
암튼 하루 정도 그렇게 보낸 건 오케이. 나머지 3일은 뭘 했나. 뭘 했나. 아 모르겠다. 계속 잤나. 계속 잤구나... 철푸덕. 요즘은 이상하게 연휴가 되어도 여행도 안 가는 꿀꿀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지라. 좀 반성 중이다. 이제 하반기 계획도 좀 짜고... 뭔가 활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