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주문하였으나 다음 주에 온다고 하고 (이제 이번 주구나) 주말에 읽을 범죄소설이 필요한데 없다니. 그래서 삼성 코엑스에 볼 일 있어 간 김에 영풍문고에 들러서 이 책을 샀다. 범죄/추리소설 류는 대부분 샀으니 사실 가판대에 올려져 있는 책들 중에 고를 만한 게 없었음을 고백. 그러니까 저 책들이 다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다.... 쌓였...ㅜ 어쨌든 - 말하면 뭐하리 - 그래도 그래도 하는 심정으로 둘러보다보니 <부스러기들>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 왔다. 아. 이거 사고 싶다고 보관함에 두고 아직 구매안한 책이다! 반가움 뭉실뭉실. 

 

아이슬란드의 여성 추리작가인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헥헥. 자판으로 치기도 어렵다)의 토라 시리즈였다. 근데 자세히 보니 <부스러기들>이 이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 오, 저는 순서대로 읽기를 원해요. 하면서 뒤지니 1편이 나와 있었다! 그것이 이 <마지막 의식>. 표지를 보고 대략의 내용을 보니, 사도 될까 싶을 정도로 끔찍스러웠다. 다시 내려놓고 다른 책을 골라 보려 했으나 실패.. 결국 일단 1편을 보고 결정하자. 아니면 중간에 그만두면 되지 뭐 하고는 집어 들었다.

 

재미있다. 물론 그래서 <부스러기들>도 조만간 사볼 것이다. 다만, 시리즈 중간 책들은 아직 안 나왔다는 게 찝찝하다. 순서대로 봐야 하는데 라는 강박증이 생기면서... 어쨌든 재미있다. 여성변호사인 토라 구드문즈도티르가 주인공이고 그의 파트너인 독일계 경시청 출신 형사(?) 매튜 라이스의 케미가 특히 재미있고. 내용도 사실 많이 잔인하고 마녀사냥이니 주문이니 저주니 질식성애니 마조히즘이니 자해니...(으윽)... 이런 것들 때문에 음산하긴 하지만, 결말로 가면 그게 주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근본적으로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이야기라는 것. 그게 마음에 들었다.

 

토라와 매튜의 대화 내용은 유쾌하다. 허당스러운 토라와 약간 시크한 매튜와의 밀당이랄까.

 

"구드문즈도티르 부인." 매튜가 불렀다.

"그냥 토라라고 부르세요. 그게 훨씬 쉬워요." 토라가 매튜의 말을 잘랐다. 그가 구드문즈도티르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마치 아흔여덟 살은 먹은 과부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p72)

 

큭. 귀여운 토라. 그녀는 실제 1편에서 36살의 돌싱녀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다.

 

토라가 서둘러 의사를 막았다. "선생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니 굳이 사진을 보여주실 필요 없습니다."

매튜가 토라를 보며 히죽거렸다. 토라가 이 상황에 역겨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고소해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 (중략) ...

토라는 혐오스러운 사진을 차례대로 들여다보았다. 순간 견디기 힘든 메스꺼움이 치밀어 오르자 토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겨우 한 마디를 웅얼거리고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매튜가 짐짓 놀랐다는 듯 조소에 가까운 말을 의사에게 던졌다. "이상하네요, 아이를 둘이나 낳으신 분인데."

(p89-90) 

 

밉살스러운 매튜. 토라에게 역겨운 사진들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어쩌고 저쩌고 했다는 데에 대해 이렇게 반격을 하다니 말이다. 이게 매튜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만...ㅎ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혹시 변호사님이 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매튜는 인사를 건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기를 떠벌렸다. "그래서 제 목소리를 좀 들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토라는 깜짝 놀랐다. 머리가 돌아버린 건지, 술을 마신 건지, 아니면 농담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예상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토라는 쓰레기 같은 리얼리티 쇼의 소리가 매튜에게 들리지 않게 리모컨을 집어들어 볼륨을 낮췄다. "독서 중이었거든요."

"월 읽고 있는데요?" 매튜가 물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쟁과 평화>요." 토라가 둘러댔다.

"그렇군요." 매튜가 이죽거렸다. "혹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랑 많이 비슷한가요?"

토라는 주먹을 꽉 쥐며, 매튜가 절대 알 수 없는 할도르 락스네스 같은 아이슬란드 작가의 이름을 대지 않은 걸 후회했다.

(p159)

 

빵 터졌지 뭔가. 허당 토라와 이를 놓치지 않고 놀려대는 매튜.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커플이다. 이후에 어떻게 될런지는 다들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이 꽤 유쾌하다. 이 커플 보는 재미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만 한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게 정말 재미있으려면 이런 요소들만 있으면 안되겠지. 토라가 이혼하고 아이들 둘을 돌보아야 하는 워킹맘이고 그래서 늘 시간과 돈에 좇기는 모습이 이 속에는 있다. 대책없는 전 남편과의 관계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기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대처해야 하는 엄마로서의 모습이 있다. 그 중에도 남자와의 섹스를 꿈꾸는 30대 중반의 보통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있고, 그럼에도 전문적인 자기 분야에서 인정 받고 싶어하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보기도 하는... 한 마디로 토라라는 인물상은 아이슬란드 뿐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의 여성이고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현실처럼 느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

 

<부스러기들>을 사보자.

 

 

 

 

 

 

 

 

 

 

 

 

 

 

 

 

그나저나, 아이슬란드 라는 나라는 생각할수록 묘하다. 전체 인구가 30만이라는데, 이런 추리소설 작가만 해도 몇 명이며 그 작품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재미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에를렌두르 시리즈), 라그나르 요나손(스노우 블라인드),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이 작가,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우리나라같이 작은 나라가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글을 쓰듯이, 북유럽의 국가들은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언어로 글을 쓴다. 많지 않은 인구에서 이런 이야기꾼들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인구가 30만이면, 세종특별자치시 정도의 규모라는 건데... 우리나라 도별 인구분포를 볼 때 대부분 백만은 넘는다. 서울은 천만에 가깝고. 그렇게 작은 나라인데.. 라는 놀라움이 계속 남는다...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번역본은 2009년이 끝이었다. 왜왜?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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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4-23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ㅌㅋㅌㅌㅋㅌ

비연 2017-04-23 23:53   좋아요 1 | URL
읽어보세요~ 락방님도 좋아하실 듯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