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걸 - 에드거 앨런 포 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9
T. 제퍼슨 파커 지음, 나선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어제 부산에 갔더랬다. 주로 여행을 갈 때 가져가는 책은 추리소설류로, 이번엔 읽고 있던 '망량의 상자'를 들고 갔다. 부산까지 KTX로 3시간. 사실 차만 타면 그냥 자버리는 나로서도 그 불편한 의자 위에서 3시간을 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상권만 들고 갔는데, 가는 길에 다 읽어버리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저녁에 다시 부산역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3시간동안 차 안에 갇혀 있는데 읽을 수 있는 게 없다니. 나는 역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점을 찾는 하이에나 비연.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 서점이 있었고 그 안에서 난 저녁도 쫄쫄 굶은 채 책을 고른다. 괴상한 행복이 엄습하고, 결국 내 손에는 처음에 마음 먹었던 얇고 가벼운 책 대신 영림카디널에서 나온 두툼하기 짝이 없는 책이 쥐어져 있다. 짐도 많은데 여간 낭패가 아니다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어쩌면 좋은 책과 우연히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슬쩍 스쳐간다.

이 책, '캘리포니아 걸'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목 자체가 은근히 도발적이고 작가(T.제퍼슨 파커)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른 것이라 처음부터 흥미진진했다. 내용은 폰 가족과 베커 가족의 아들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는 1950년대 초반. 그 때부터 그 두 가족의 긴긴 인연은 수많은 세월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며 이어지게 된다. 폰 가족에게 있는 두 딸, 리조트와 자넬은 그 당시 10살이 한참 못되는 아이들이었고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어내게 된다. 특히 자넬 폰은, 리조트처럼 가족을 등지고 떠나지 못한 댓가로 그 동네에 남아 마약과 섹스, 술에 절어든 생활을 하게 되지만, 특유의 낙천주의적 감성과 빼어난 미모로 다른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는 아가씨로 자라게 된다. 베커 가족의 아들들은 각각 목사, 형사, 기자로 크고 10년도 넘게 자넬 폰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들이 청춘을 보내게 되는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 히피족의 등장, 마약과 무절제한 생활에 대한 청소년들의 탐닉, 케네디의 암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등등으로 인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인생이 주는 많은 회한들 속에 살아가던 중, 자넬 폰이 엽기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3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에 놓인 그녀의 목. 베커가의 아들들은 불쌍한 인생을 지내야 했던 그녀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여 이 사건을 파헤치고 수많은 비밀과 다양한 사람들의 오고감이 지속된 끝에 범인을 검거하게 된다...그리고 36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그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 그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세월이라는 것,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그 무게에 눌려 나도 3월을 마지막으로 추리소설 리뷰를 쓴 이후 근 2달여만에 다시 리뷰를 쓸 마음이 생겼는 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과 한 여자의 일생을 접하는 동안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은 제 마음대로 돌아가고 그 가운데 상처입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은 모두의 귓가에 울려퍼진다.

알아내고자 하는 자들의 눈과 귀, 그리고 손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진실들은, 오히려 가려져 있을 때 견디기 쉬웠던 것들이었다. 부모와 형제, 아내, 아이들 그리고 가끔씩 스쳐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그리고 노인으로 바뀌어가는 나의 모습을 중심으로 흐려졌다 명확해졌다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벌이는 숱한 일들에 의해 희생되는 많은 것들의 명멸이 세월의 더께 위에 하나씩 내려앉는다.

여기에는 천재 탐정이나 완벽한 형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너무나 닮은, 내 주위 사람들을 뚜렷이 기억하게 하는 소도시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 때문에 고민하고 일 때문에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을 기만하기도 하지만, 또한 늘 진실성을 마음에 담고 정의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캐릭터들이, 그래서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듯 느껴지는가 보다.

그냥 추리하고 범인을 찾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 추리소설 혹은 그 비슷한 류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들어가며 늙어가며 인생에 대해 회한을 느끼고 죽어간 여자를 둘러싼 가지각색의 현실들에 분노하기 보다는 착잡함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소설적 감성과 스토리 구성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덕분에 한번도 본 적없는 그 장면, '캘리포니아 걸'이라고 선명한 노란색으로 강렬히 그려진, 통통한 네이블 오렌지를 내밀며 미소짓고 있는 새까만 머리의 미인과 그 뒤에 줄지어선 오렌지 나무가 인상적인 선블레스트 오렌지 상자의 라벨 그림이 남색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광경이 마치 본 것처럼 내 눈앞에 생생히 떠올려진다. 사진기로 한번 찰칵 누른 듯한 그 영상은 닉에게나 앤디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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