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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공주
카렌 두베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용은 간단하다. 옛날 옛적 눈으로 덮여 있는 외딴 나라에 지참금은 보잘것없지만 눈부신 미모를 지닌 리스바나 공주가 살고 있었고 어느날 따뜻하고 부유한 왕국 바스카리와의 디에고 왕자가 그녀에게 반하여 구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사모하는 또 다른 기사 브레두르에 의해 해프닝이 연출되고 그로 말미암아 거절당한 디에고 왕자가 급한 김에 공주를 납치하여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도 다른 환타지 소설마냥 마법사니 용, 기사, 난쟁이들이 등장하기는 하나, 기실 이 작품은 현대의 우리가 환타지에 잘 녹아난 설정이라고 생각된다. 상처입은 주인공들, 까닭없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않은 리스바나 공주나 자신을 미워하고 불신하는 아버지를 둔 브레두르 기사나, 정원을 돌보느라 아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어머니를 둔 덕분에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된(동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식물을 모조리 먹어치우려는 의도로) 디에고 왕자나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안에서는 곪아가고 있는 그 무엇들 때문에 자신을 속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1년여동안 서로 수없이 엇갈렸다가 만났다를 반복하면서 경험하는 숱한 일들은 비단 경륜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이는 성숙한 사람들로 진전되게 한다. 무작정 독점하려 하고 알고 있는 것에만 복종하려 하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을 벗어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각자의 속에서 울려퍼지는 실제의 마음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커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환타지의 양식을 빈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때론 좀 지루하기도 했었다. 사건 면면은 놀랍기도 하고 박진감이 넘치기도 했고 안타까움에 가슴 조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절제된 문체여서 그랬던 듯 하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마치 내가 이들과 긴긴 인생역정을 함께 한 것 같은, 어쩌면 우정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조차도 한층 컸다는 느낌까지 가지게 했다.
무엇이 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세 주인공이 마음이 원하는 선택을 하고 각자의 길을 당당히 나아가는 마무리는 좋았다. 친구같은 그들이 그 마음으로 주욱 담대하게 살았으면 하는 홧팅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도 한번 더 기운내라고 얘기한다. 내 속의 기운에 응답하는 사람이 될 것을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