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 조각상의 그림자 - 상 - 로마의 명탐정 팔코 2 밀리언셀러 클럽 23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책 광고를 할 때 추리소설이라고 내세우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걸, 문득 느꼈다. 예전의 전통적인 추리소설이라 하면 사건이 나고 문득(물론 사건에 개입할 만한 충분한 공간적 시간적 개연성은 주어지지만) 비상한 탐정이 등장하여 요리조리 그 인과관계들을 따져본 후 결론을 내는게 일반적인 구성이라고 한다면, 최근에 추리소설이라 이름붙어 나오는 소설들은 딱히 추리소설이라 부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러가지 쟝르를 붙여줄 수 있을만한 작품들이 많다. 소위 말해서 '역사 추리'라는 것도 그렇다. 얼마전 베스트셀러였던 '다빈치 코드'를 필두로 수없이 많은 역사 추리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의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혹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이 현대의 화두가 되어 사건과 탐정 비스무레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역사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뭏든 추리소설이라고 사들어 읽다보면 이게 추리소설이냐 그냥 소설이냐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냐를 두고 괜스레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서론이 길었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린지 데이비스의 '팔코' 시리즈야 말로 그런 느낌을 많이 가지게 하는 책이라는 게다. 어찌 보면 역사물이고 또 어찌 보면 모험 소설이자 영웅담이고 또 다르게 보면 고전 의상 차려입은 신분 차가 확연히 나는 두 남녀의 애정 행각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느낌을 가지든 간에 이 책은 재미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들이 이 소설에는 다 등장하지만 어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아귀가 딱딱 맞고 게다가 더할 나위 없는 위트가 가미되어 손에서 책을 뗄 수 없었노라 말하는 오류까지도 범하게 한다.

1편인 'Silver Pigs'는 끝이 아니었다. 범인이 잡히었고 진상이 규명되었으니 사건 종결, 2편은 아마 새로운 얘기가 등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나의 기대는 첫 장부터 무너졌다. 1편에서 죽고야 만 헬레나의 작은 아버지 시체를 수거하는 팔코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하는 서두에 어라 이거 연작이네 하는 심정이었다. 1편에서 얽히고 섥혔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몇몇 주동자가 제거된 후 남겨진 원로원 의원들끼리 다른 방향으로 음모를 확장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저 그들에게 황제의 전갈을 전하고자 밀사의 역할을 했던 평민 출신 팔코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이 사건의 핵심에 뛰어들게 되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비밀들은 충격의 연속이다. 하긴 전혀 예측하지 못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처음부터 실마리를 아예 제공하는 작가의 솜씨 탓에 일찌감치 알아채었다) 전개하는 형식이 너무나 박진감 넘치고 잡힐 듯 말 듯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교묘한 데다 미워할 수 없는 많은 주변 등장 인물들의 역할이 버무려져 소설의 질은 한층 깊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보다 팔코와 헬레나와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은 압권이다. 현대에 대뜸 불러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만치 대등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그들의 관계는 이 소설을 더욱 볼 만하게 하는 주된 요소이다. 또한 역사적인 배경을 짜임새있게, 마치 사실인 양 여겨질 정도로 자세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글재주에는 두손 두발 다 들게 된다. 이런 걸 감탄이라고 하지.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비참하고 매우 절절한, 그러니까 로마라는 봉건사회에서 부딪히는 많은 신분과 권력의 장벽들, 부자와 빈민들간의 좁혀지지 않는 금전적 차이들 등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도 있겠으나 탁월한 위트와 해학으로 읽는 사람에게 왠지 모를 밝음을 안겨주는 구석이 있다, 이 책은. 그게 세상을 바로 보는 관점을 흐리게 하는 거라고 경직되게 말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린지 데이비스가 창조해낸 팔코라는 탐정(극중에서는 정보원)의 캐릭터는 그 어떤 여타의 탐정들보다 멋지고 유머러스하고 일상적인 매력이 있음을 인정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올해도 다 가고 있는데 나는 어쩌면 올해를 팔코와 함께 마무리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손에는 '베누스의 구리반지'라는 팔코 시리즈 3편이 턱 하니 잡혀 있기 때문이고 이걸 읽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날 재간이 없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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