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때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정글같은 회사에서 열심히(?) 지내다가 토요일은 내가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찾아 다니고 만날 사람 만난다. 일요일쯤 되면 사실 일주일간 기진맥진하여 몸살기운이 슬며시 찾아오는 것이 밖에 나가기 힘든 몸상태가 되곤 한다. 오늘은 특히나... 이전에 했던 약속마저 잠시 뒤로 미루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온종일 쉬니 이제 좀 낫다. 무엇보다 이 편안하고 차분한 시간들이 나를 좀더 건강하게 하는 모양이다.

 

강릉 테라로사에서 사온 과테말라 커피를 꺼내서 커피머신에 적절한 물을 붓고 나무 스푼으로 몇 숟가락 톡톡 거름종이에 커피가루를 털어낸 후 시작 버튼을 누르면 금새 브라운색 커피물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반복적인 리듬에 넋을 잃고 쳐다보며 잠시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담지 않곤 한다. 하얀 백지상태가 되는 것을 느낀다. 정신을 차려 내 전용 머그에 커피를 부을 땐 그 퍼지는 커피 내음으로 행복함에 젖어본다. 그렇게 머그잔 가득 커피를 받아서 방에 들어와 폭신한 소파에 앉아 읽던 책을 펼친다. 몸살기운으로 나른나른해진 몸에 커피와 책을 벗하니 뭔가 구름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이런 게 신선놀음인가.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읽었다. 헤르타 뮐러의 동명 소설은 아직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사실 그 전에 읽은 줌파 라히리의 책들은 내겐 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퓰리쳐상도 탔고 (상이 중요하다는 건 아니고... 대체로 퓰리쳐상을 탄 작품들은 내게 재미는 주었었다) 다른 분들도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작가인데 어쩐지 내 정서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까 말까 정말 망설였는데, 어제 밤 문득 끌려서 펼쳐 보기 시작했다. 무려 550페이지 가량의 장대한 소설이다. 다 보는 데 하루의 2/3는 쓴 것 같다.

 

다른 책들보다는 나았다. 역시나 나의 맘에 딸깍 맞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는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형제와 그들의 아내인 가우리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어렸을 때부터 자라기까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각자의 인생을 살게되고 아이를 낳고 손녀를 보고.. 하는 거의 4대에 걸친 일대기 속에 인도의 역사와 정치를 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가족에 대한 상실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 속에서 서로의 섬세한 생각의 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줌파 라히리는 원래 가족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있는 작가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역사 속에서의 개인에 좀더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의 역사이든 사람의 역사이든, 긴긴 세월동안 변화해가는 그 모습들을 담아가는 이야기에 많이 약하다. 특히, 한 사람이 어린 시절에서 젊은 시절로 나이든 시절로 그리고 이제 어딜 가도 두 번은 못 오리라 예감하는 노년에까지 이르는 짧지만 긴 인생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린 소설엔 아릿함을 매번 느낀다. 개인의 인생이 역사의 큰 톱니바퀴 속에서 마모되고 지쳐가고 희생되어 가는 과정은 그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그리고 바로 집어든 책은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다. 구태여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 작품들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작가들은 있다. 대표적으로 박민규. 이 사람 작품은 꼭 본다. 그리고는 옛 작가들을 즐겨 찾는 것 같다. 이문구, 박경리, 박완서... 가끔은 신경숙.

 

현세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이니만큼 지금의 작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아는 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에는 시대상이 있고 그 속의 인간군상들의 삶이 녹아 있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시대이자 나이고 나의 주변인들이기 때문이다.

 

첫장을 펼치니, 이런 단락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라이더들은 바람과 급격한 외기 변화, 햇빛 등등에 몸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걷거나 뛰는 일반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복장을 갖춘다.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눈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다 (p7)

 

웃음이 피식 난다. 요즘 안 그래도 주위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난 불행히도 자전거를 못 탄다..) 딱 그들을 연상케하는 단락이라 말이다. 재미나게 읽어볼 생각이다.

 

 

 

함께 읽는 책들이다. 소설만 읽어가지고는 머리에 기름을 잘 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의 책들이 필요하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는 저녁에 자기 전 읽고 있고 (말하자면 취침용이다..ㅎ)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점심 시간 남는 짜투리 시간에 읽고 있다. 주중에도 나는 편안한 시간들을 조금씩 누리고 있다. 나에게 편안한 시간 소중한 시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읽는 시간이다.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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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4-10-2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선놀음이라는 것에 공감가면서 저도 그럴때 행복감을 느끼곤해요

비연 2014-10-26 18:34   좋아요 0 | URL
mira님~ 첨 뵙네요^^ 알라딘 서재가 좋은 건 이런 심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자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