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여행. 이런 거 해본 지 백만년은 된 것 같다. 작년 5월인가. 일본에 가서 음악회 참석했을 때가 마지막. 그 이후로는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친구와 여행을 가거나 선후배와 여행을 가거나 동료와 출장을 가거나.
사실, 그걸 원했는 지도 모른다. 나이가 드니까 혼자 가는 여행이 좀 적적한 건 사실이니까. 누구랑 얘기는 하지 않아도 뭘 먹을 지 의논하고 어디를 갈 지 상의하고 밤에 잘 때 같이 와인이나 맥주나 홀짝거릴 상대가 심히 필요해지는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 게 좀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급적 누구를 꼬셔서 여행을 가는 방향을 선택해왔던 것 같다.
이제, 혼자 가는 여행을 다시 해야 할 시기가 된 듯 싶다. 다 좋은데, 생각하고 책읽고 할 시간이 부족하다, 누구와 함께 하는 여행은. 여행의 종류별로 행선지별로 같이 가는 여행이 좋을 때가 있고 혼자 가는 여행이 나을 떄가 있고 하니까. 이번엔 혼자 가는 여행을 택하고 싶다.
그러나, 뭐. 휴가내기도 여의치 않은 판국이라. 과연 내 뜻대로 될런지는 미지수다. 그냥 요즘 많이 상상하고 있다. 어딜 갈까 하면서 여기저기 인터넷이나 책이나 기웃거리고... 언제쯤 휴가를 낼 수 있을까 하며 달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행선지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조금 끌리는 데가 있어서... 한번 추진해봐야겠다 라고 맘먹는 중이다.
<인튜이션>은 절반 정도 읽다가 집어치웠다. 그닥 재밌지도 않은 내용을 어지간히 자세히도 쓴 책이더라. 의사결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끝까지 읽기 힘들지 않을까 라고 내맘대로 생각하면서 덮어버리고 이 책을 집었다.
하지만 대체 왜? 통증은 행복의 대가였을까, 행복을 누린 벌이었을까? 통증의 어원은 '처벌'을 뜻하는 라틴어 '포이나' (poena), '갚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네' (poine),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겪어야 하는 처벌과 고통'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펜' (peine)이다. (p37)
통증의 어원에는 은유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예전에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읽을 때도 비슷한 내용을 봤을 지도 모르겠지만, 새삼 느껴본다. 통증이든 질병이든 생물학적인 객관적 주체라기보다는 뭔가 의미를 담아 바라보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그것을 벗어나려고 해도 객체들의 그러한 시선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기억하고.
내가 좋아하는 류의 책이다. 뭔가 주제를 잡고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문학적 등등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관점을 설파하는 책. 쉽게도 쓰였고 해서 두껍지만 술술 넘기고 있다.
하지만 통증을 이렇게 이해했더라도 은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통증이 지속되면 생물학적 질병은 나 자신의 앓이로 바뀐다. 앓다 보면 사람이 바뀐다. 사람이 바뀌면 자신의 삶, 경험, 성격, 기질에 비추어 앓는 상태를 재해석하게 된다. 자기 자신, 주변 상황, 문화, 역사와 연관된 온갖 의미가 떠오른다. (p26)
정확한 지적이다. '재해석'이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 일해야 하는데 이 책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이 느낌은 뭐지. (뭐긴. 일하기 싫은 도피지.ㅜ)
근데 이거, 여행가고 싶다고 제목달고 얘기하다가 책 얘기로 빠지는 이 삼천포는 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