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읽었다. 대단한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고 또 이런 류의 이야기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라서 평온한 마음으로 읽었는데... 책장을 덮는 순간, 심장에 아릿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마흔 한살의 래리 오트는 고등학교 때 첫 데이트를 했던 신디 파커가 실종되는 바람에 살인자 강간자의 의혹을 받으며 20여년을 버틴 사람이다. 아무도 안 찾아오는 집과 직장인 정비소에 앉아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책만 파고들고 닭들과 벗삼아 지낸다. 20여년을... 혼자. 말상대라고는 치매 걸리기 전의 어머니와 닭뿐인. 상상이 안되는 적막강산 속의 그. 그런데 최근에 그 지역 유지의 대학생 딸이 실종되면서 다시 의심을 받게 된다. 보안관이 매일 와서 정탐을 하고... 어쩌면 그 보안관이 와주기라도 해서 외로움 의 한 켠에 빛이 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동갑내기인 사일러스 존스는 예전엔 잘 나가는 야구선수였다가 지금은 형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앤지라는 여자친구가 있고 홀어머니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야구팀 등번호가 32이라서 '32'라고도 불리워지는 사람. 인구 5백명 정도의 작은 도시 미시시피 주 샤봇의 유일한 경찰관.

 

그 둘은 30년 쯤 전에 친구였고 그 추억은 3개월에 불과했다. 그리고 래리는 백인이고 사일러스는 흑인이었다. 래리는 흑인들이 절반 이상인 동네에서 어리버리하고 독특하여 따돌림받는 백인이었고 사일러스는 180cm가 넘는 장신의 멋진 야구선수가 되어 인기가 아주 많은 흑인이었다. 래리는 근방에 2백만평의 땅을 소유한 부유한 집 아들이었고 사일러스는 쫓기듯 시카고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엄마가 하루종일 노동을 하여 근근히 먹고 사는 집 아들이었다. 인종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고 가정환경도 다르지만... 그들은 친구였다.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추억을 공유한.

 

가면을 쓴 남자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총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장갑 두 짝 모두 빨갛게 핏물이 들어 있었다. "죽어." 라고 남자가 다시 말했다. 래리는 그것도 괜챦겠다고 생각했다. - p22

 

누군가가 나에게 총구를 겨누며 죽으라고 하는데.. 어떤 상황이면 그것도 괜챦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나같으면 두려워서 살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를 그 짧은 시간에 마구마구 생각했을 것 같은데... 죽으나 사나 매한가지의 상황에 처한 사람은 어떤 걸까... 저릿.

 

"사일러스?: 녹음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날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래리야. 래리 오트. 귀챦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냥, 어, 통화를 하고 싶었어. 내 번호는 633-2046이야." 래리가 목소리를 가다듬는 동안에도 사일러스는 받아 적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돌아온 거 봤어." 래리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 사일러스. 잘 자." - p47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건 래리. 그리고 전화번호조차 받아적으려 하지 않는 사일러스. 나중에 이 둘의 인연이 밝혀지게 되고, 사일러스가 왜 래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알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사일러스. 외로운 친구에게 전화 한통 해주지.. 라는 아쉬움과 원망감이 깃들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아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가끔, 그 사람, 꼭 그 사람과 통화하고 애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일종의 외로움일테지. 그 사람이라야 채워지는 외로움.

 

헛간 문에 기대선 그는 수십 년 전 여기 왔던 날을 떠올렸다. 어른도, 선생도, 여자애든 남자애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무도 없었고, 자신과 래리 뿐이었다. 래리를 따라 집 안을 돌아다니던 일이, 소총과 엽총이 선반에 줄지어 서 있는 총기 수납장을 지나 뒷문을 열고 거대한 마당으로 나서서, 바퀴 달린 헛간 문을 굴려서 열고 헛간 안으로 들어갔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p116

 

남녀노소, 흑인과 백인,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 이렇게 성별과 연령과 인종과 권력구조 등을 다 무시하고 이 헛간에 있는 사람은 사일러스와 래리, 두 소년 뿐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구별들과 그로 인한 갈등들, 오해들을 다 물리치고 이 공간에서는 이 소년들의 존재와 그들의 어린 시절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때의 추억이 수십 년이 지나도 떠오르는 지 모른다. 온전히 나라는 인간으로만 비추어질 수 있는 공간, 세계, 그리고 벗.

 

................. 좋은 소설이다. 그냥 소설이다. 무슨 범죄소설이라고 명칭 붙이기에는 사건이나 추리나 이런 것들이 없는. 사건 뒤에 숨겨진 운명과 긴긴 세월의 이야기들이 담겨진 책이다. 표현도 섬세하고 담담하고. 그래서 읽는 내내 그냥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톰 프랭클린의 작품이 번역된 건 이 책 하나 뿐인 듯 하다. 앞으로도 나오면 읽어볼 용의가 생기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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