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을 읽은 후 어라? 생각보다 재밌네? 라는 생각에.. (그러니까 내가 정식으로 소세키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 세상에나) 냉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샀다. 근데 도착한 책을 보고 아주 뒤로 넘어갈 뻔. 무슨 국어사전이 하나 툭 튀어나오지 뭔가. 무려 600여 페이지!
도대체, 고양이가 사람 관찰하는 얘기로 무슨 600페이지가 넘는 얘길 썼단 말이냐... 라는 못마땅함에 한켠에 휙 밀어두었다가... 괜한 호기심에 슬금슬금 가서 뒤적거리기 시작한 지 며칠 되었다.
이 책은 취향도 없고 구조도 없고 시작과 끝이 어설프기만 한 해삼같은 문장이어서, 설사 이 한 권을 내고 사라진다고 한들 전혀 지장이 없다. - '상편 自序' 中
해삼이래 해삼... 아 이 단어에 완전 처음부터 빵 터졌지 뭔가.
예부터 같은 것들끼리 서로 구한다는 동류상구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대로 떡장수는 떡장수, 고양이는 고양이가 알아보는 것처럼, 고양이에 대해서는 역시 고양이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한다. 인간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나 그것만은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그들 스스로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곤란하다. 특히 동정심이 결핍된 우리 주인 같은 사람은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pp39
고양이의 관점이라니. 왠지 뜨끔하는 이 감정은 무엇인지?
미학자 메이테이 선생이 예전에 우리 주인을 평하길 "자넨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역시 일리 있는 말을 한 셈이다. 이 떡도 주인처럼 참 알 수가 없다. 씹어도 씹어도 10을 3으로 나눌 때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번민에 빠져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두 번째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동물은 직감적으로 사물의 적합, 부적합을 예견한다.' - pp55
비유가 촌철살인이다. 10을 3으로 나눌 때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니. 마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을 떄의 느낌이 든다.
그러나 고양이의 슬픔은, 힘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을 당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세상에 강한 힘이 권리라는 격언까지 존재하는 이상, 고양이의 논리가 아무리 이치에 맞다 하더라도 고양이의 주장이 통하지는 않는다....(중략)... 이치로 따지자면 이쪽이 맞지만 저쪽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 자신의 뜻을 관철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나는 물론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멜대를 어떻게든 피해야 하기 때문에 숨어들 수밖에 없다. - pp187
인생의 진리를 사람보다 민첩하게 알아버린 고양이가 아닌가 말이다.
읽고 있으면 시름이 다 잊혀지는 책이다. 백년도 전의 소설인데 하나 낯설지 않은 걸 보면, 그래서 소세키 소세키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참에 현암에서 나온 소세키 전집을 다 사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드니... (참아라 비연 참아라 비연... 아멘)
지금 일차분으로 네 권만 나왔고 나는 두 권을 사두었으니 두 권만 더 사면 되네? 흠.. 급유혹스러운 이 심정이라니. 그냥 두 권까지만 더 살까 싶기도 하고.. (우히히)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근대소설도 꽤 괜챦은 책들이 많은데 말이다. 그런 책들을 놓은 지가 꽤 오래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남의 나라 사람 소설은 좋다 좋다 하면서 정작 우리나라 사람 소설은 등한시한 듯한 이 죄책감은 뭔지.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쩝쩝.
요즘 문학동네에서 나온 현대소설책들을 한권씩 사모으고 있다. 뭐 꼭 우리나라 사람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내셔널리즘 비스므레한 생각은 아니지만. 특히 내가 좋아라 하는 이 사람.
박민규의 소설은 특별하다.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하다. 읽고 있노라면 뭔가 다른 느낌을 준다. 이 단편소설집도 그렇다. 하나하나 현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언가를 무리없이 말한다.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필체로. 그래서 좋다. 이 책은 통근버스 안에서 읽는 책. 오고가는 길이 그래서 요즘 많이 즐겁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네.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