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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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추리소설이라 함은 소설의 부류 중에서도 낮게 치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적인 상상력이나 영감, 유려한 문체 혹은 철학적 사유 등등 우리가 문학 작품을 대할 때 흔히 기대하는 것들을 채우지 못하는 류라고 보는 것이고 너무나 대중적인 작품의 특성도 그에 한 몫을 하는 듯 하다. 물론 추리소설 매니아로서 그런 작품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차피 추리소설이라 함은 대부분 일단 발생한 사건에 대한 감추어진 플롯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그릇일 뿐이고 그 전개과정이나 구성이 재미있다면 꼭 문학적일 필요도 없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하지만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은 또한 그러한 한계를 많이 극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보면, 비단 살인사건과 범인이라는 단순한 로직에서 벗어나 범죄라는 매우 단적인 현상을 기반으로 하여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인간들의 심리, 인간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 범죄라는 것이 일어나기까지를 뒷받침하고 있는 인과관계 등을 탁월하게 묘사하여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주곤 한다. 이 밖에도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있다.

이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는 범죄를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병리현상이라는 면에서 파헤침으로써 어쩌면 여타의 다른 문학작품보다 더 리얼리티를 더하는 장르가 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등장하는 탐정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에 나오는 혹은 기타 고전적인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하나의 단서를 가지고 머릿 속에서 요리조리 범죄의 현장을 구성하기 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사건을 귀납적으로 풀어나가곤 한다. 마치 우리가 흔히 드라마 등에서 접하는 형사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욱 생동감이 느껴지고 그들이 사건의 현장에서 느끼는 비애랄까 허무랄까 하는 것들이 더욱 마음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사설이 길었지만, 말하자면 내가 이런 것들을 다 감지하고 있음에도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음이 원통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원래 하드보일드 류의 작품을 그다지 찾지는 않는 나였기에 꼭 이 추리소설을 읽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많이 알게 된 하드보일드 장르 작품으로 인해 조금씩 유발된 흥미는 이제 이 작품으로 인해 확고해진 느낌이다.

일단 제목부터가 너무나 문학적이고 함축적이다. 동서문화사에서는 '거대한 잠'으로 번역되어 나왔으나 내 개인적으로는 'Big sleep'이라는 원제목을 살리는 것이 이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더 잘 나타낼 거라는 번역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필립 말로라는 탐정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잘생기고 키가 큰 외모의 33살 미혼남자인 그는 냉소적이고 건조하며 매우 현학적이지는 않으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위트가 있는, 그러면서도 용기가 필요할 때는 더없이 과감해지는 멋진 캐릭터이다.

유전사업으로 돈을 번 스탠우드 가문에서 협박 편지에 대한 사건 의뢰를 받은 필립 말로가 사건을 파헤쳐가면서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만나게 되고 그 살인사건들이 각각 일어나고는 있으나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추리소설도 문학작품의 당당한 일원임을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이 작품을 영화화할 때 원본을 그대로 살리라는 제작자의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살인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며 가족과 사회의 숨겨진 병폐 속에서 무르익은 것임을 노골적인 표현 없이도 이렇게 잘 느껴지게 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제부터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다 읽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작가가 나이가 듦에 따라 원숙해져가는 탐정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모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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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6-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나긴 이별이 가장 좋더군요^^

비연 2005-06-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홋! 물만두님. 기나긴 이별 부터 냉큼 사봐야 겠슴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다작을 하지 않았음이 너무나 슬퍼지더이다..

물만두 2005-06-0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으세요^^

비연 2005-06-0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쿄쿄쿄~ 그럼 안녕 내사랑이 그 다음인가요, 만두님? ^^

물만두 2005-06-0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나온 순서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비연 2005-06-0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만두님..감사해요^^

oldhand 2005-06-0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녕 내사랑을 먼저 읽고 나서 그 다음부터 순서대로 읽었는데요, 역시 처음 작품부터 읽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챈들러의 말로 시리즈는 사람들 마다 좋아하는 작품들이 제각각 이라서 더욱 살아 숨쉬는 명작들이라는 생각이...

비연 2005-06-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오랜만입니다^^ 방가방가~~ 말로 시리즈의 묘미에 흠뻑 빠져 이 여름을 보내려고 합니다, 제가..ㅋ comment 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