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이 그랬으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고른 건 표지 때문이었다. 내게는 매우 낯선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이고 '북구의 모나리자'라고까지 불리어진다는 유명한 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번쯤은 눈길을 머물게 하는 마력이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절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단언한 것처럼, 이 작품 속의 소녀의 분위기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트라는 열여섯살 짜리 소녀가 타일공이었던 아버지의 사고로 집안이 기울자 베르메르댁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사려가 깊고 늘 많은 생각이 있는 그리트는 곧 다른 하녀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게 되고 베르메르의 그림 그리는 일을 돕게 된다. 물감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약재나 돌을 곱게 가는 일은 그리트의 마음을 떨리게 하고 처음부터 아련하게 가지고 있던 '그' 즉 베르메르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크게 만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많은 사연 끝에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한 모델이 되는데...

어리고 가난한 소녀가 화려한 예술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을 이 소설은 매우 섬세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소박한 개신교도의 집에서 늘상 보아오던 환경에서 떠나 성모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여기저기 걸려있고 노란 공단 망토와 진주 목걸이를 한 여주인이 있는 집에 머무는 것은 소녀에게 두 집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공허함을 안겨주게 된다. 그리고 말없이 그림만 그리는 주인의 모습에서 이 상황들을 잊게 할 피난처를 발견하고 그의 그림들 속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흐름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또한 하녀와 주인이라는 관계. 권력을 가진 자와 그 아래에 있는 자, 그리고 그것이 묘하게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규정된, 혹은 화가와 모델의 역할로 규정된 상황에서 느껴질 수 있는 사소하면서도 강한 끌림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그려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실존인물이었던 반 레이원후크라는 인물이 소설에서 말하듯("너 자신으로 남아있도록 해라."....."그런 말이 아니야. 그의 그림 속에 있는 여자들....그 여자들을 그는 자기의 세계에 가둬놓고 있어. 너 역시 거기에서 길을 잃을 수 있어.") 어쩌면 그리트와 '그'의 관계는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그 속에는 가난도 없고 빚도 없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고 복잡한 인간관계도 없는 그저 순수하고 투명한 세상 속에 갇혀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관계가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는 건 그 감정의 결이 너무 고와서, 그리고 끝내는 서로의 떨리는 손길과 뜨겁게 부딪히던 눈길만이 뒤에 남겨져서일 게다.

주변 인물들의 설정도 하나하나 살아있다. 철저하게 그 당시 그림들을 분석하여 만들어낸 도시의 모습과 한 명 한 명의 성격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여자로서 육감적으로 그리트를 멀리하는 카타리나와 코넬리아의 미묘한 질투심, 같은 하녀이고 더 오래 그 집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늘 그런 상태인 타네커의 냉정함, 여자이지만 좀더 큰 구도 속에서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큰 마님, 마리아 틴스의 중량감, 돈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믿는 전형적인 캐릭터인 반 라이번의 탐욕스러움, 가난 속에서 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리트 부모님의 의혹과 떨림 등이 정말 실존했던 인물인 양 아귀가 딱 들어맞아 소설 읽는 재미를 한층 더했다.

그리트를 사랑하는 푸줏간집 아들 피터가 "넌 네가 속하지 않는 세계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 그리트. 그 사람들의 세계는 너의 것이 아니야." 라고 말했듯, 그리트는 영원히 빠져버릴 듯했던 그 세계에서 과감히 나와 '핏물이 든 손톱과 앞치마'라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는다.

작가는 그림 한 점에서  느껴지는 감상들을 바탕으로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 살아있는 세계 이상의 그 무엇을 구현하는 재주를 보여주었다. 그저 그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질 수 있는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 생활상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마음 저변의 짙은 감정들을 세세하게 들어내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어느새 그들의 세상에 흠뻑 빠지게 한다.

읽는 내내 마치 아름다운 시 한 편 읽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신비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소설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는데 이 감정의 미묘한 線들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꼭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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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4-03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님의 찬찬한 리뷰를 보니 정말 이제는 더 못버티겠다 싶어요. 저두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 추천합니다!

비연 2005-04-0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감사해요^^ 저도 방금 님의 서재에 들어갔었는데..ㅋㅋ

미네르바 2005-04-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의 섬세하고, 정결한 리뷰에 감탄합니다. 이 책 보관함에 담겨진 지 오래였는데, 더 이상 못참겠네요. 다행히 저희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이 있네요. 어서 빌려 읽어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추천!!

비연 2005-04-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과찬의 말씀을...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