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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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의 시집이다.

개인적으로 시라는 쟝르에 익숙하지 않다. 교육의 잘못이라고 혼자 궁시렁대며 탓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짤막한 글들을 읽노라면 꼭 그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만이 내 속을 지배하여 시에서 응당 느껴야 할 감상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걸 매번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게 더 큰 까닭이겠다. 게다가 누군가의 시집이라 함은 남들이 많이 읽고 내 눈에도 익숙한 시들만 있는 게 아니라 싫든 좋든 그(녀)의 작품들을 모조리 읽어내야 한다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시집을 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 속에서 이 책을 산 것은 몇 편씩 조각조각 다가오는 싯구들이 내게 예사롭지 않은 감흥을 안겨주었던 탓이다. 느낌이라는 것에 많이 의존하는 나로서는 그러한 내 가슴 속 파장을 쉽사리 물리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디 한번 하는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 하다

- 자명한 산책 (全文) -

일상적인 것, 그래서 너무나 익숙해진 그 무엇에 대한 시인의 느낌은 마치 내 몸에 그 보도블록이 닿는 듯 매우 구체적으로 매우 탐미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표제시인 '자명한 산책' 하나만 보아도 이 시인의 시세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뭔가를 자꾸만 에두르고 뭔가 구름잡는 듯한 단어들로 나를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피부, 내 발, 내 손에 맞닥뜨려지는 사물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들을 아주 솔직하게 얘기함으로써 시인은 내게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그저 탐미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고찰, 젊은 날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심심한 삶에 대한 얘기 등등을 담은 황인숙 시인의 시들을 주욱 읽어내려가면서 문득 스산하게 비내리는 오후에 차 한잔 들고 창 앞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나를 떠올려본다.

나는 나이지만 나를 스치는 것들,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만 간다. 그 속에 남겨진 나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고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세월을 견딘다. 그것이 슬프다 아름답다 가치판단을 하기에 앞서 그저 나를 바라보는 입장으로 약간은 관조적으로 슬슬 자신의 감정 실타래를 풀어놓는 시인의 글귀들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어떤 화두를 던지는 듯 하다.

어디 한켠에 놓아 먼지 쌓이게 하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주말에라도 한번 다시 집어들어 조금 천천히 음미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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