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평화다. 부모님은 근교에 여행 가시고 동생네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사실이긴 하다)로 오지 못 하게 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 나만의 장소, 나만의 휴식을 갖는 드문 기회이다.

최근에 많이 아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일의 중압감과 스트레스, 양이 만만치 않았는데 주말에도 가족이나 친구들과 계속 만나 사회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  결과인 것 같다. 이런 적이 없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고 중간에 병원도 갔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번 주말은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자고 먹고 책보고 하며 칩거하기로 했다.

 

마음에 일을 완전히 떼내지 못해서 계속 무거운 걸 보면 나도 사회 속에서 일중독 증세가 생기나 보다 싶어 씁쓸하다. 머릿 속을 비우고 싶은데 계속 껌처럼 붙어서 몸은 여기 있으나 정신은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이런 땐 그저 맘에 맞는 책 속에 코를 박고 나 몰라라 하는 게 상책이다.

 

다시 한번 승효상의 책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그의 건축적인 컨셉도 좋은데 글솜씨도 이리 좋으니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 속에 사유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야 마는 그의 세계가 부럽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 분의 책을 읽으니 베를린에 혼자 다시금 가고 싶어졌고 모로코의 페즈를 가고 싶어졌다. 프랑스의 수도원들을 돌아보며 내 속을 찬찬히 성찰하는 기회도 가지고 싶어졌고. 그의 말인즉 '마음이 새로우면 아무리 하챦은 것도 새롭게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너무도 신비스럽다' 라는 데에 절렬히 동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들을 두루 다니고 싶어졌다. 꽤 많은 곳에 가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봐야겠구나 싶다. 봉정사의 영산암도 부석사의 무량수전도 가본 곳이고 보면서 느꼈던 마음의 감동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 분의 책 속 글귀를 벗삼아 다시 바라보고 싶어진다. 폐허 속에서 아름다움과 인생의 본질을 깨닫는 그의 철학에 깊이 감동하며 성주사지도 가고 싶어진다... 아. 올해는 국내 사찰들을 다니는 걸 계획해볼까.

 

무언가 자꾸 새로운 것만을 찾고 오래된 것을 헐어 그 위에 삐까뻔쩍하고 천박한 물건들을 세우는 것에 와 하는 요즘 세태가 나는 불만스럽다. 서울의 많은 곳들이 그렇게 허물어져갔고 다시 돌아보기 싫은 곳으로 전락했다. 내가 갔던 그곳들. 그곳의 정겨움, 그곳 서민들의 생활, 그곳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들이 몽땅 사라져버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간판으로 떡칠을 한 거리같지도 않은 거리가 근간에 너무 많이 생겼다. 무엇을 하건 철학이 필요하다는 걸 그래서 절감한다. 철학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와 그냥 시류에 영합하여 스스로를 내세우는 자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 이상이 있다. 승효상의 글들 속에서 이런 나의 생각과 동질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오늘, 이 고즈넉한 평화의 시간 속에 얻은 최고의 쾌거이다.

 

이제 쉬면서 다른 책을 꺼내본다.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 읽지 못했던 책. 이 책으로 오늘 오후를 보낼 생각을 하니 더없이 좋다. 치유되지 않았고 위로받지 못했던 사람에게 책은 유일한 도피처요 위안일 수 있다. 지금처럼 지쳐 있는 나에겐 이런 책이 정말 어울리겠다 싶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까지 3년 동안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보냈다. 나와 내 가족의 삶을 행동과 계획과 움직임,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채웠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 삶을 빽빽하게 채워도, 아무리 빨리 달리고 돌아다녀도,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다.

달리는 걸 멈춰야 한다. 모든 일을 멈출 시간이다. 이제는 읽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책 p11 中)

 

나도 마찬가지이다. 좀 한 숨 돌리고 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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