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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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로 먼저 접했었다. 음습한 감옥 안에서 단 두 명의 죄수가 앉아 끊임없이 떠들던 그 모습과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책으로 한번은 다시 봐야겠다 벼르고 벼르다가 이번에 보게 되었다.

낭만적인 동성애자 몰리나와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정치범 발렌틴이 한 감옥에 수감된다. 몰리나가 '캣피플' 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해주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고 이러한 대화는 몰리나가 풀려나기 전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계속된다. 그 이야기들은 그저 흔하디 흔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몰리나의 마음과 시각을 담보하고 처음엔 싸구려 이야기라며 냉소하던 발렌틴은 갈수록 그 이야기들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몰리나와 발렌틴은 '사랑'을 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가석방된 후 발렌틴의 부탁을 위험한 상황에서도 실행하려 했던 몰리나는 죽게 되며 고문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발렌틴은 몰리나처럼 자신의 상상을 한 편의 드라마로 완성하며 이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몰리나의 모습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동성애자. 미성년자 추행혐의로 감옥에 들어오게 된 그는 어찌 보면 매우 추잡한 인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이고 그 사랑을 실천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성적인 감성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책에서는 곳곳에서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을 주석으로 달아놓아 과연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왜 낙인찍혀 버림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려를 하게끔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러한 성향을 가졌든간에 그것이 과연 질타와 비난의 대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몰리나라는 사람은 겉은 남성일 지 모르나 마음은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과 애정으로 충만하였다. 그는 이미 사랑하게 된 발렌틴을 사모하는 마음을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적절히 묘사하며 스스로의 감정을 전달하려 했고 발렌틴이 (의도적으로 넣어진 음식을 먹고 걸린) 병으로 앓는 동안 조석으로 보살핀다. 또한 교도소장을 이용하여 먹을 만한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와 자신보다는 발렌틴을 먹이기에 열중하는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런 모습들 속에서 과연 성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형태론에 입각하여 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정치범 발렌틴은 감옥 밖에서 배운 이데올로기적인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된 사람이다. 그는 사상을 위해 사랑을 희생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압한다. 그래서 몰리나의 애정지상주의에 서슴없이 경멸을 보이고 항상 강박적으로 사상서를 읽으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사상이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가두고 표현하지 못하게 하며 벽을 쌓게 만드는 도구로써 작용한다. 하지만 몰리나와의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에워쌌던 껍질을 벗어던지게 되고 끝내는 쓰레기처럼 여겼던 소설적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 묘사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이러한 몰리나와 발렌틴의 결합, 그리고 폭력에 희생되는 몰리나의 모습, 편견 자체였던 발렌틴이 변화하는 모습들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완전히 상반되는 성향의 인물 설정과 그 결합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억압과 폭력과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가 하면 양 극단이 사실은 아예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비치기도 한다. 사회에서 멸시의 대상인 동성애자의 마음은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차 있고 사상적으로 투철하고 지적인 정치범의 가슴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는 설정 또한 매우 아이러니하다. 중간 중간 사회의 주류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편입되지 못한 존재들이 주변인으로서 느끼는 심정들도 드러나는 점은 주시할 만 하다. 무엇보다 너무나 많이 얘기가 되고 있어서 이제는 소설의 주제로 다루기에는 지겨울 정도인 그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 대화체 형식으로 끌어가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작가의 솜씨에 이끌려 쉼없이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추었다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현 세대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문제들을 어렵지 않으나 천박하지 않고 쉬우나 의미심장하며 반복적인 형식 속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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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2-0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추천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