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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ㅣ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7
이철수 지음 / 삼인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철수라는 판화가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이 책을 샀다. 그래서 책을 펼친 순간, 살짝 당황했음을 인정한다. 그저 소소하게 적은 엽서들이 윗칸을 채우고 그 내용들을 다시 옮겨놓은 아랫칸을 보면서 굳이 읽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일었다. 짤막짤막한 말들이 촘촘히 메워진 엽서들을 보면서 한동안 고민했다.
편지 쓰고 싶은 날이 많아서,
편지 받고 싶은 날이 많아서,
제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있는 그리움이 제 '나뭇잎 편지'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작가의 머릿말을 보고서야 시간을 들여 읽을 것을 결심할 수 있었다. '제 안에 있는 그리움'이라는 그 말에.
망설이며 시작한 첫 장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왠지모를 따스함이 가슴에 배여 잘 읽었다 이런 심정보다는 이 책이 내게 다가온 것도 인연이겠구나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문득 나도 내 손으로 직접 고른 엽서에 손수 펜을 들고 자잘한 글씨로 적어서 우표를 붙여 보내고 싶다는 바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루하루가 참 무료한 우리네 삶일 수 있겠다. 매일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며 피곤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온종일 이사람 저사람에게 치이며 이 일 저 일에 내키지 않게 끌려다니다가 머릿 속이 무언가로 꽉 채워져 더 이상 뭔가 들어갈 공간이 없음에도 가슴 한가운데는 뻥 뚫린 채 집으로 들어와 대충 마무리하고 이불 속으로 괴롭게 들어가는 삶이 자주 내 생활을 파고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에 매몰되어 지내면 아마 이런 생활은 점점 더 흔하게 나와 맞부닥칠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지쳐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엽서들을 보면서 주위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둘러보게 된다. 계절의 변화를 조용히 알려주는 작은 변화들, 억압된 일상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 이웃들, 언제나 나를 믿고 지켜주는 가족이 보인다. 매일 쳐다보는 밥상머리의 모락모락 김 올라오는 밥과 반찬들이 새롭고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이 다사롭다. 손으로 꾸욱 쳐서 생명줄 끊어버리기 일쑤인 벌레들도 한 세상 함께 살아가는 동지로 보이고 인연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실타래로 바라보게 된다...이런 감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치듯 지나갔다.
'마중물'이라는 말 아시나요? 모터나 펌프로 샘물을 길어올릴 때 공기 압축을 위해 처음 부어 넣는 바가지 물 한 그릇을 이르는 말입니다. 물 내려가 버린 '뽐뿌질'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깊은 샘에서 물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때쯤은 펌프 지렛대를 고르게 눌러도 수월하게 물이 쏟아지지요. 첫물은 대개 더러워서 못 쓰고 한 소끔 쏟아버리고 나면 먹을 수 있는 맑은 물이 나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작은 목소리, 힘겨운 참여가, 다음 세대나 더 긴 앞날을 위해 쏟아 붓은 마중물일지도 모릅니다. 이건 우리들 몫입니다. 천천히, 지혜롭게, 그러나 분명하고 단호하게!
아직은 마중물입니다.
그렇듯 소소한 일상이나 논하고 있었다면 끝자락쯤엔 지루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중간 중간 사회라는 것,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참여라는 것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엽서들을 보면서 내 머리와 가슴에 새벽 찬물이 끼얹어진 듯, 서늘함을 끼치곤 했다. 시골에서 판화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무심하게 사는 듯 해도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지내는 큰 공동체의 방향성과 그 속에서 개개인이 해야할 작은 발걸음들에 대해 늘 인식하며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나하나 큰 부담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임에도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