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공부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가끔 우리나라 어떤 소설들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건 개인적인 경험을 너무도 많이 써먹어서 이 책이 저 책 같고 저 책이 이 책 같은 느낌이 들 때이다. 비슷한 배경, 비슷한 사유, 비슷한 인물들...그리고 비슷한 문체. 처음에 작가로 데뷔할 때는 누구나 자신의 지난 경험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처녀작을 내기가 쉽다. 한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다. 경험에서 느꼈던 숱한 상념들을글로 다 풀어내어야 끝내는 자신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일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은 도약이 필요하다. 그 때부터는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폭넓은 정보수집과 독서, 연구, 생각 등이 덧붙여져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사설이 길었지만,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일견 흡족함을 느꼈었다. 작가는 스페인의 19세기 말의 시대적 배경과 정통 검술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토대로 한 편의 멋진 추리극을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은 1860년대 후반, 이사벨 2세 여왕의 치세하에 있던 스페인이다. 왕정에 대한 반감들, 공화정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이 끓어오르는 남비뚜껑처럼 덜그럭대던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작가는 정통 검술이라는 분야를 파고든다.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진부함이라던가 골동품처럼 기억되어가고 있는 정통 검술을 직업으로 삼아 한 때는 영광스런 시절을 지냈으나 지금은 초로의 검술교사일 뿐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전통을 지키고자 애쓰는 한 인물,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음모와 야욕, 배신, 그리고 사랑을 참으로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며 최고의 검술 공격법에 대한 고민만이 일상을 지배하는 그에게 우연히 나타난 한 여자가 있었고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생활에 출렁임이 일어난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나는 끔찍한 살인사건, 비밀 문건, 뒤이어 밝혀지는 진실들이 박진감있게 펼쳐진다.

이 책은 많은 얘기들을 담고 있다. 우선, 민중이 힘이 되는 세상의 목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일상들,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야기되는 대립들이 매우 리얼하고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당시 스페인이 어떠했겠는가를 그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여서 그 어수선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어찌 보면 매우 촌스럽고 어찌 보면 매우 순수한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정치적인 정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검술에만 몰두하고, 없이 살지만 품위와 명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올곧은 사람이다.  "권총은 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뻔뻔한 도구일 뿐이지요. 만일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리고 인간이라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합니다. 저만치 떨어져서, 마치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온 불량배가 하듯이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칼에는 다른 어떤 무기에도 없는 칼만의 윤리가 존재합니다...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글쎄, <신비>라고 해야 할까요...검술은 기사들의 신비 철학입니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는 더욱더 그럴 겁니다" 이 말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숨겨져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아마도 정체성이 점점 없어져 가는 오늘날 무언가 지켜야 할 것들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고집스런 노인네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누군가는 고수해야 할 그 무엇 말이다.

아름다운 한 여인의 등장으로 돈 하이메의 고뇌는 시작된다. 이제 그런 '사랑'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늙어가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했던 그에게도 가슴 한 구석 꺼지지 않은 열정이 있음에 놀라한다. 나이듦에 대한 쓸쓸한 감회가 곳곳에 잘 살아난다. 여성 고객인 아델라 데 오테로의 젊음과 아름다움 덕분에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는 하루하루 건강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어느새 그녀가 자기 집 문 앞에 나타나는 시간을 갈수록 조바심을 내며 학수고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녀의 시신 앞에서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홀로 늙어가는 외로움이, 고뇌가 느껴져왔다. 하지만 반역의 소동 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은 그를 혼비백산하게 하고 결국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신을 존중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의 검술 대련에 대한 묘사는 완벽했다. 그건 단순한 진검승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 하이메가 자신이 그리도 추구하는 것을 찾는 과정임과 동시에 일순 일어났던 뜨거움을 식히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었다.

한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많은 얘기들을 절묘하게 버무려내는 아르투르 페레스 레베르테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한 가장 큰 수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검술 용어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뒷부분의 설명을 연신 들춰보아야 했던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긴 하나 그런 낯섬조차도 이 책의 매력을 경감시키는 데 일조를 하진 못했다. 시대와 인생에 대한 회한의 심정으로 대했던 책이 중반 이후로는 살인사건이라는 급박한 계기로 추리소설화되고 있어 한번 들면 놓지 않게 하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돈 하이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과연 정신없이 변해가는 세상의 소용돌이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미련하리만치 고집스럽게 사수하는 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도한 욕망과 서슴없이 저질러지는 배신행위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 그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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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1-0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슬비님..꼬옥 읽어보세요..^^ 글고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