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사두고 아직까지 안 읽은 것은 아이러니다. 미야베 미유키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사는 족족 다 읽어대는 나인데..하긴 생각해보니 사놓고 안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으으윽. 이럴 수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하면서도 시간은 없고 있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는 상황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아뭏든 올해 1월 1일. 무슨 책으로 새해를 시작해볼까나. 하고 책이 잔뜩 쌓인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택한 책이 이 책 '얼간이' 이다. 뭐.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싶지만 그런 건 없고. 새해 첫날부터 머리 아픈 책은 읽기 싫었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책도 싫었고 너무 무서운 책도 싫었고 조금은 인간미 넘치면서 해학이 있는 책이면 좋겠구나 라고 막연히 생각하다가 고른 책. (흠 이게 그럴싸한 이유에 속하는 듯? 큭큭)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이야기는 정말 좋다. 요즘 일본이 복고풍인지라 에도열풍이 불어서 책이며 드라마며 영화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유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소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야기들은 다양하지만 그 바탕에 흐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시대를 초월한 감동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아주 똑똑하거나 특출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모자란 듯 하고 좀 허술한 듯 하지만 마음이 깊은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그 내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마음까지 도닥여주는 내용들이 많아서 읽고 있으면 참 푸근해진다.
얼간이 무사인 헤이시로와 그의 조카이자 곧 양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유미노스케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몇 개의 소설이 이어진 연작소설로 다 다른 내용 같지만 나중에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 아주 절묘한 작품이다. 헤이시로는 40대 중반의, 정말 어쩔 수 없이 무사의 직책을 맡아 유유자적 다니는 사람으로 딱히 잘 되고 싶은 욕구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만,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천재 미소년 유미노스케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진 미움들을 밝혀내고 그것을 잘 무마하는 역할을 해낸다. 늘 내가 이런 것 까지 해야 하나 갈등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그렇게 해나가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미야베 미유키 에도소설의 묘미이다. 이러한 캐릭터들이 내 옆의 사람인양, 혹은 나인양 느껴지게 함으로써 빠져들게 하는.
문득, 물만두님이 이걸 읽으셨겠지 싶어서 한번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동서고금 같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이라고 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이 작품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 미스터리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점이 좋았다. 정이 깊은 오토쿠 아줌마가 논다니 오쿠메를 받아들이고 오쿠메가 오토쿠가 쓰러졌을때 구박받은 것도 잊고 간호하던 것,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거두는 젊은 관리인 사키치의 따뜻한 마음씨와 서로 그 아이를 돌봐주는 모습은 없는 형편에서 넉넉한 인심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물질적 풍요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 있어 사람이 더 행복하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나만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은 불행해도 좋다는, 아니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들이 만연해있는 지금 차라리 얼간이라 불리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2010. 11. 03. 리뷰
만두님도 나랑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측은지심.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나를 참 예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게끔 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