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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여간해선 책도 손에 잘 안 잡히고 밤에 잠이 안와 뒤척이기 일쑤인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며칠 전에도 자려고 눈을 질끈 감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기만 하는 바람에 문득 벌떡 일어나 책장에 다가갔었다. 뭘 읽을까. 이 야밤에 추리소설을 읽자니 좀 무섭기도 하고 가뜩이나 무거운 심정에 벽돌 하나 세게 내리치는 격이 될 것 같았고 어려운 책을 읽자니 머리가 잘 회전되어 줄 것 같지도 않았고...남들 다 자는 밤에 일어나 난데없는 고민을 하다가 불현듯 눈에 띈 책이 이 책이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올해 장영희교수가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사두었다가 쭈욱 잊고 있었던 책이었다.
장영희선생은, 돌도 되기 전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나중에 암환자로 일생을 마무리해야 했던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천형같은 삶' 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던 분. 오히려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 (Count your blessings)' 는 말을 되뇌이며 자신의 축복들을 수도 없이 얘기하는, 그래서 '천혜 (天惠)'의 삶을 살았노라 당당히 말하던 장애인이었다.
6년이나 고생하면서 만든 논문을 도둑질당했을 때에도 절망과 희망이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러나 넘어져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며 안도하는 학생이었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제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은 무릎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따라서 더욱 아름다운 선율을 내기 위해 연습을 하는 거라고 힘내라고 위로하던 선생님이었다.
먼 훗날,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되겠노라 말하던 수필가였고 다섯살짜리 조카의 예쁜 말들에 감동을 받는 평범한 이모였다.
묶여진 작은 글들 속에서 발견된 장영희선생의 모습은 이렇게 다양했다.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많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조금 다른, 어쩌면 조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된 한 사람이 우리에게 남긴 소박하고 정감어린 글들은, 이미 이 글들을 쓴 사람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감상까지 더하여 나를 참 아릿하게 했다. 수필이라는 건, 누구나 쓰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어려운 글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는 일들을 예민하게 그러나 담담하고 소탈하게 바라볼 줄 아는 관점도 관점이지만, 느낀 바를 너무 어렵지 않은 문체로 사람들에게 쉽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토막토막 글을 쓰기란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제 그 분의 이런 글들을 다시는 못 보리라는 생각은 허망함을 안긴다.
읽고 나니, 나의 같쟎은 허무함이나 허탈함이 조금은 가라앉았더랬다. 세상을 살면서 잊고 있었던 느낌들, 추억들, 사람들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음을 그래서 난 결코 외롭지 않다는 걸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들이 일깨워지는 기분에 마음이 포근해졌더랬다. 날씨가 스산해지고 연말이 다가와 이런 저런 마음에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삶이 재미없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겐 효과좋은 약과 같은 책이다. 나에게 내려진 좋은 처방처럼,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같은 느낌을 가지리라 믿는다. 그 밤, 이 책이 내 눈에 뜨인 건 내게 큰 축복이었고 작은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