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책이 나오면 제가 나서서 널리 읽히도록 하고 싶네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마세요." (p258)

 

100세 시대라고 한다. 60대는 이제 노년이 아니잖아, 청춘이지, 라고 말한다. 80대에 돌아가신 분 장례식장에 가면 사람들은 그런다. 너무 일찍 가셨어. 그렇지만 그건 그냥 하는 소리일 뿐. '사회적으로는' 60세가 넘어가면 그냥 노인이다. 국민연금도 65세는 되어야 나오고, 대중교통 수단 무료 이용권도 70세로 높여야 한다고, 고령인구 많은데 60대가 무슨 노인이냐며 이야기하지만, 60대의 사람들을 일할 사람으로 보진 않는다. 아니 일할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도 안 하려는 일, 막 부려도 되는 일, 허드렛일 등에 넣어도 될 만한 연령대의 '노인'으로 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삶에 대해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삶에는 비상구가 있기 마련이고, 살고자 하면 살아남는 법'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날들을 근심하지 않았고 노후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퇴직하자마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들이 연달아 돌출했다. 언제 어디서나 있을 것이라 믿어 왔던 삶의 비상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p15)

 

38년간 공기업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한 조정진님에게 편하게 노후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어졌을 때, 세상은 냉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은행에서는 대출을 갚으라고 닥달을 하고, 아들은 비싼 학비가 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가진 경력으로 취직을 다시 해보려 하지만 '나이 잡수신 노인을 어떻게 부려 먹습니까.(p16)' 라는 얘기에 머물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임계장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長)을 줄인 말.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사지 육신 멀쩡하게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만을 요구한다. 그 전에 있었던 경력도, 지식도, 다 필요없고 그냥 '사람' 하나 때우는 일에 넣었다가 몸 상해 버티기 힘들어지면 그냥 바로 갈아끼우는 부품 취급을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우는 좋아지지 않고 돌아오는 건 싫은 소리와, 자르겠다는 소리와, 책임지라는 소리 뿐이다. 직장이라고 나갔는데 어디 편하게 머물 곳도 없고, 제공하는 장소는 벌레가 나오고 비좁고 추운 곳이다. 최저임금이 도입되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을 정상화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 수를 줄이고 총액을 맞추는 구조로 운영된다. 남은 사람은 남아서 고맙다 열심히 일하지만, 한 사람이 서너 명, 어떨 땐 예닐곱 명의 일을 해야 한다.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문득 터미널을 둘러봤다. 구석구석을 쓸고 있는 등이 굽은 할아버지들과 늦은 오후 영화관으로 출근하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만 봐도 인력의 80퍼센트가 비정규직이고 그중 많은 수가 임계장들이었다. 이 고단한 이름은 수많은 은퇴자들이 앞으로 불리게 된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임계장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p39)

 

나는 아니야. 난 나이 들어도 저렇지 않을 거야. 라고 대책없는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는 나같은 사람에게 (사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아직 당해보지 않은 일이니) 이 대목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아 자욱을 남긴다. 드라마나 영화나, 잡지나, 어디에서든 나이들어 전원생활을 하고, 나이들어 취미생활을 하고, 나이들어 못해본 것들을 이루어내는 사람들 이야기 투성이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훨씬 많은 사람들은 70세가 넘어서까지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내 것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혹여 운이 좋아 내 것이 되지 않더라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이다. 누군들, 삶의 예측할 수 없는 길을 비껴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게 뭐가 있어? 나도 이 바닥에서 밥벌이하면서 위에서 시키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해냈다고! 밥벌이가 그렇게 쉬워?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 돼. 늙은 영감탱이를 써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지금 어디서 불평이야?" (p42)

 

"너 이 자식, 대대손손 아파트 경비나 해처먹어라." (p78)

 

"어이, 경비, 이 새끼, 너 전에 공기업에 근무했었다며? 거기서 국민 세금을 마구 쓰던 습관을 아직도 못 고쳤군! 주민들 피 같은 돈 들어가는 공동 수돗물을 펑펑 써? 이 새끼, 당장 잘라야 할 놈이네. 네가 버린 수돗물 값은 네 월급에서 까게 해주마. 너 오늘 아주 제대로 걸렸어." (p98)

 

"뭐야, 이 새끼, 신고를 하든 조치를 하든, 지금 바로 해! 당장 살 수가 없는데 내일이 뭐야, 내일이. 당신 그런 일 하라고 월급 주는 거 몰라? 한번만 더 오밤중에 오토바이 소리 들려봐. 가만두지 않겠어." (p101-102)

 

"아빠, 저 경비 아저씨, 참 힘들겠네."

아빠가 대답했다.

"응, 많이 힘들 거야.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저럼 된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야 해." (p103)

 

읽으면서, 슬프다 씁쓸하다 이런 게 아니라 고통이 찾아왔다.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비정규직 노동자들, 나이든 노동자들, 시급 받으며 온갖 일 다하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들 성질머리를 있는 대로 퍼붓는 이런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한테도 비수인데 직접 듣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다가갈까.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 된 거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p122)

 

이불을 꺼내려고 이불장을 열자 벌레들이 무더기로 흩어졌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는 무엇보다 청결해야 한다. 자주 세탁하고 해충을 없애지 않으면 여러 잡균에 감염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숙소의 침구에는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전임자들의 20년 묵은 체액과 체취가 배여 있었다. 이 냄새에 적응해야 경비원 생활을 할 수 있다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터미널 고속에 입사해서 퇴사할 때까지 숙소에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서 악취 나는 쓰레기를 매일 주무르고 음식물 잔반통을 씻으며 살았기 때문에 왠만한 냄새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경비원 숙소의 냄새를 맡으며 잠을 잘 수는 없었다. 1980년대 군대 내무반보다 더 못한 취침 환경이다. 자는 곳이라기보다는 심야 근무를 교대하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곳에 가까웠다... (중략) ... "당신들이 쓰는 침구를 왜 회사가 세탁해 줘야 합니까. 그런 건 당신들이 빨든지 새로 사든지 알아서 해요." (p213-215)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하셨었다. "사람 하나하나는 하나의 우주다. 한 명이 고통받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주가 침해받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아래, 노인이라는 이름 아래,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주여야 할 사람을 뭉개고 멸시하고 하찮게 대하는 곳들이 있다. 힘이 없으니, 돈이 급하니, 일을 해야 하니, 참아나가는 그들의 마음 속 우주는 정말 시커멓겠다.. 싶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자리에 그 사람이 필요해서 앉혔으면 그 직종 자체를, 그 사람 자체를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고 대해야 하고 최적은 아니라도 기본적인 살만한 환경은 제공하면서 일을 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역지사지라고. 말하는 너같으면 그런 데서 일하겠는가,  사람 대접 못받는 직장에서 일하겠는가.. 묻고 싶어졌더랬다.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 어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보고자 써낸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감사의 글 中)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을 억눌러 와서인지, 쌓인 고통이 터져나와서인지, 이 책 제일 마지막 이 대목을 보고 새벽녘에 혼자 펑펑 울어 버렸다. 글쓴 이의 심정이 이 짧은 글에 집약되어 나타난 듯 하여. 내가 괜히 미안하고 감사해서 더 눈물이 쏟아졌다. 학술적인 글, 비정규직이 어떻다 고령인구가 어떻다 어쩌구저쩌구 공부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론들 다 갖다붙여서 써내는 글들의 공허함을 확 걷어내고, 정말 그 속에서, 사실은 지난 세월 동안은 그 속과 전혀 무관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그 속의 일부가 되어서 담담히 써내려간 이런 글이 훨씬 더 명징하게 현실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더더욱 이 글을 쓴 이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임계장을 하고 계시겠지만, 이 글이 널리 널리 퍼져서,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글들을 내주셔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제도가 변하는 데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뿐이다.

 

 

*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살아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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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18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임씨 성을 가진 ‘계장‘ 직급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수명은 길어졌는데, 정년퇴직 나이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지금 막 노인이 된(또는 될) 세대가 위로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자식도 키웠는데, 노후도 스스로 해결해야 해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비연 2020-10-18 23:55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엔 몰랐었어요. 사실 알기 힘든 게 사실이기도 하고.
정년퇴직을 하더라도 나이에 맞게, 경력에 맞게 일할 자리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수명도 길어졌는데 연륜과 더불어 쌓인 것들이 사장되는 것도 아깝고.. 무엇보다 노후문제도 있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