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면 뭘 읽을까.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은 잠깐만 읽고 좀 나긋나긋 부들부들한 책으로 쉽게 가야지 하는 마음에 책장을 보다가 이 책을 골랐다. 사실, 집에서 읽는다면 이 책을 (사긴 샀지만) 읽겠다고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목이 끌렸다. <귀찮지만 행복해볼까>.
이런 류의 책은 그냥 두세 시간이면 뚝딱 할 수 있는 책이지만, 간혹 아주 짧은 글들 속에서 괜한 공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일상적인 생각을 일상적으로 쓰는 에세이. 번역가로서의 생활과 딸과 함께 하는 생활이 교차되는 삶.
오, 시상이 떠오르듯 랩이 절로 나오네. 인맥이나 팔로맥(follow脈)이나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맥의 수나 팔로어 수가 그 사람의 완성도는 아니니, 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제일 구려 보이는 사람은 인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맥이 넓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다. (p64~65)
뜨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p85)
끄덕..
서로 잘 지내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추억 속의 사람들은 잠시 소환했다가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게 좋다. 긴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한다. 안부는 바람을 통해 듣도록 하자. (p125)
맞아..
나무늘보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종일 집 안에만 있는 내가 느리고 게을러터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긴 세월 나름대로 쉬지 않고 번역만 하며 성실하게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자기 가치관과 다르게 산다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늘보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싶다. 나무늘보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라고. (p117~118)
누가 누굴 평가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 뿐. 남까지 평가하는 건 우습기도 하지만 심한 오지랖이다.
이 책에 나온 책 중 <배를 엮다>라는 책이 궁금해져서 보관함에 넣는다. 예전에 보고싶다고 한번 체크했다가 연말에 지웠던 기억이 나는 책인데, 역자가 쓴 글을 보니 한번 꼭 봐야겠구나 싶어진다. 이렇게 책은 책을 연결하고...
이제 이 책을 덮고 8월의 함께 읽기 책으로 돌아간다. 삼인 출판사의 책 표지는 언제나 봐도 정감 있고 마음에 든다. 그리고 400페이지 남짓의 분량과 촘촘한 글 간격에 잠시 놀랬던 마음은 지나가고 서론부터가 마음에 쏙 들어 자꾸만 읽게 되는 책이다. 사람이 고민을 많이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묘하게 그게 드러난다.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고 바람에 휘익 날아간 것 처럼 다음엔 생각도 나지 않을 말들을 흩뿌리며 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이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의 저자는, 수많은 세월 동안 관련 주제에 대해 열심으로 고민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갔고 주변도 변화시켜 나갔다는 게, 이 책 말머리에서부터 느껴진다. 그 전해지는 느낌에 신기하기도 하고, 나를 돌아보게도 된다.
나는 계급 억압의 모든 차원들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억압적 상태에 대항하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매매춘에 관한 나의 작업은 가장 가혹할 뿐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제도화되어 있고 그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태로 존재하는 성적 권력을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었다. (p27)
그러나 투쟁 속에서 이러한 핵심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필히,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급진적인 정치적 페미니즘의 근본 명제에 따라, '창녀'인 그들과 '여성'인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이 전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사실, 가부장제의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섹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포르노그라피 안의 섹슈얼리티와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는 명백하게 말해야 한다. (p28)
여성의 입장에서, 포르토그라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여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관련 책이나 이야기들, 이론들,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데,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접하게 될 때 이 부분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음을 차츰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자각 흐름 속에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들어온 책이다. 아마 좋은 독서의 시간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고... 나 스스로의 생각도 좀더 깊어지리라 기대하게 된다.
8월이다. 덥다고 한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