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어떤 연유로 알게 되어 읽겠다고 샀는 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라로님 페이퍼를 읽고 골랐던 게 아닌가 어렴풋한 기억이..) 읽어보니 이 학자의 인생도 놀랍고 이런 분야가 가능한 것도 놀랍고 무엇보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저저 깊은 곳에 흔적이 남아 누군가 그 어딘가에 있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왔다.

 

퍼트리샤 월트셔는 원래는 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이다. 화분학자라고도 해야 하나. 우연한 기회에 이 학문을 접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푹 빠진 나머지 평생의 업으로 삼아 공부한 사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다.

내 인생은 내 바람대로 훌러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이야기는 모두 이렇게 시작한다. 50대 초반의 나는 어느 날, 인생의 방향을 바꿀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며 법의학 수사의 세계로 들어섰다. (p45)

 

인생은 이런 것인가. 어느 날 받은 한 통의 전화로, 인생의 나머지를 다 바칠 만한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 물론 그 이전에는 어이없는 일로 다른 일을 했어야 했다. 어딜 가나 남자들이란.. 이란 생각을 하게 한 대목도 있었다.

 

 

나중에 나와 결혼한 당시 남자 친구는 내가 대소변과 혈액을 분석하고 쥐를 다루는 일보다는 더 '여자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다운' 이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사무직과 비서직을 위한 강의를 소개하는 광고를 보고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나는 강의를 신청했고 돈을 받는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중략)... 여기서 하는 일들은 정말 이상해 보였다. 어두운 양복 차림의 이기적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바보같이 일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기계적인 일상에 치이다 보니 매혹적인 지식들을 얻을 기회가 적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p46~47)

 

나도 궁금하다. '여자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예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선생님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자기가 왜 국문과를 선택했는 지를 얘기해줬다. 입학할 때 학부제로 들어가서 2학년 되기 전에 전공을 선택해야 했고 자기는 러시아문학이 좋아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 남자친구가 "나는 국문과 다니는 여자친구가 좋다" 라는 말 한 마디에 국문학을 선택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있어.. 라고 코웃음쳤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 남자친구랑도 헤어졌다면서 자기도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그렇게 했는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아고. 그러나 살아보니 그 때 그 때의 선택에서 가끔 그런 바보스러운 이유로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된다고 해도 그럴 때가 있는 것임을 알고 나니, 그 선생님께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뭐 어쨌든 재미있는 이유 아닌가.

 

통찰력 있는 경찰들이 범죄의 현장을 뒤쫓기 위해 식물/화분학자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인연이 닿은 관계는 주욱 이어진다. 범죄조직의 현장을 찾기 위해 차의 곳곳에 묻은 토양 표본들과 현장의 표본을 대조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고 시체가 파묻힌 곳에 범인들이 갔었는 지를 찾기 위해 범인의 소지품을 다 조사하고 그 균류와 먼지의 성분, 토양의 성분 등을 대조하여 알아내기도 한다. 에드몽 로카르의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라는 말이 여실히 입증되는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책은 단지 그런 직업적인 면만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퍼트리샤 윌트셔라는 사람의 자라온 이야기들. 살아온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인생과 어찌 연결되는 지를 말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죽음이, 사람의 생과 사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은 것임을, 누구나 그 길을 가고 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이 험한 일을 하는 데에도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노라 이야기한다.

 

종종 죽음, 강간을 비롯한 여러 범죄에 관한 경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질문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죽음을 통해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명은 내 딸과 할머니였다. 아직도 지혜와 위안을 주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그립다. 내 딸 역시 내게 아픔을 주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가슴속 깊이 간직한 그 아이를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생각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마주친 사체들 역시 이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 깨닫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존중하고 보살필 수 있었다. 비록 검사대 위의 사체가 나와는 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사체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나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객관적이지 않으면 쓸모 있는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체가 한때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p359~360)

 

그래서 이 책의 원제가 <The Nature of Life and Death> 인가보다. 사건을 추적하고 균류와 먼지를 분석하고 실험으로 그들을 대조하여 범죄를 좀더 명확하게 보는 데 일조를 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역시, 사람이 산다는 것, 나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거기에서 나서 그 곳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슬프지만 어쩌면 인정해야 하는 일인지도. 인간의 육체는 죽고 나면 그저 기존의 자연 모습 그대로 분해되어 자연의 분자와 원자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것.

 

 

나는 범죄 현장에서 구더기가 끓는 시체를 한동안 살폈고,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시체를 썩게 내버려 두는 미국 테네시주의 '시체 농장'에도 가봤다. 나는 여러분을 피가 흠뻑 젖은 카펫과 쿠션이 있고 회색과 갈색 곰팡이가 잔뜩 자라 희생자가 살해된 순간을 밝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던디의 한 아파트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무들이 무성한 숲과 외딴 황야에 버려진 시체들, 영국 남부 한복판에서 환각을 일으키는 독성 식물과 함께 벌어지는 샤머니즘 의식, 실종된 수많은 소녀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얕게 파묻힌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여정에서 또한 여러분이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끌고자 한다. 거기에는 나의 사랑과 상실 그리고 어린 내가 자연 세계의 드넓은 경이에 눈떴던 웨일스의 작고 좁다란 골짜기가 있다. 그 끝에 지금껏 내가 식물과 동물, 미생물을 관찰하면서 발견한 경이로움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다면, 이 작업은 성공인 셈이다. (p19)

 

 

책을 읽다가 '시체 농장'에 대한 글을 읽고 허걱 했는데, 그러니까 1970년대에 퓔리엄 배스 라는 미국 인류학자가 녹스빌 테네시 대학과 인접한 삼림지대에 부지를 받아 시설이라는 걸 세운 게 시초라고 한다. 말하자면 시체를 산재시켜 놓고 호나경이 시체가 부패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 위해 시체들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곳이라고.. 헐... 심지어 퍼트리샤 콘웰이 이에 대한 책도 썼다고 해서 찾아봤다.

 

 

 

 

 

 

 

 

 

 

 

 

 

 

 

 

 

번역판까지 있었다니. 이건 제목만 봐도 읽기가 싫어지는 류의... 이 책에 이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써놓아서 더 그런 것 같다.

 

시설에 기증된 시신은 수많은 종류의 버려진 시체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한다. 시신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때로는 특이하고 기괴한 상태에 방치되며 그 부패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다. 이런 과정이 충분히 자주 반복되면 특정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 이 시설이 유명해지자 수많은 박사 과정 학생들이 사체나 그 주변 토양 그리고 그곳에 대량 서식하는 곤충들에 관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p197)

 

 

여기까지. 곧 점심 시간인데... 학문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말 깨끗하지도 완벽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것임을 다시한번 절감. 뭔가를 밝혀내기 위한 과정은 가장 지독하고 무시무시하고 지저분한 과정인 지도 모르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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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9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4월에 서점 갔다가 저 책을 보고 너무 사고싶어져서 보관함에 넣어뒀었거든요. 여즉 안사고 있었네요. 7월 구매에 넣겠습니다. 너무 궁금해요. 읽어보니 ‘호프 자런‘의 [랩걸]과 비슷한 것 같아요. 아, 너무 읽고 싶ㄴ에요. 오늘도 책이 도착했고 내일도 도착할텐데 또 사고 싶네요. 이런...

문득 인생을 살면서 성장과정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요.
저 고등학교때 화학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본인은 수학과를 가려고 생각했대요. 그걸 과학선생님이 알고 오시더니 ‘숫자만 계산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공부가 과학이야, 과학이 어떠니‘ 라고 하셔서 화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하셨거든요.


저 대학때 남자친구가 긴 머리 자르지 말라고 긴 머리가 좋다고 해서 내내 제 긴머리를 자랑스러워했던 생각나네요. 아 짜증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점심 맛있게 드세요, 비연님!

비연 2020-06-29 12: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이 책. 정말 다양한 식물종과 균류 등의 이름들이 나와서.. 가끔 헷갈리는 것만 빼고는 ㅎㅎㅎ
저도 지금 신간들 보면서 아 책을 또 사야 하나... 일단 보관함에 푱푱.. 까지만 하고 있는데. 내일까지는 버티려구요. 양심상 그래도, 7월에 샀다고 하고 싶어서... (조삼모사 ㅜ)

긴머리..ㅋㅋㅋㅋ 전 예전 남친이 짧은 스트레이트 머리 귀엽다 해서 짧은 스트레이트 머리만 고수했던 한 때가. 꼬불이 파마하고 싶어도 참고.. 이런. 하나쯤 짜증나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흠냐.

점심.. 먹어야죠. 맛나게 맛나게. 먹는 게 맛날 때가 좋은 거다 하고 푸짐하게 먹을 생각.. ㅋㅋ
다락방님도 맛난 점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