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의 신회>를 다 읽고, 아 두꺼운 책 다 읽었다! 만세를 외치며 이번엔 그냥 머리 식힐 책으로 골라야지 하며 고른 책이다. 이 책 소개글이 그랬다. 북유럽 코지 미스터리라고. 그래, 코지 미스터라고 분명 그럤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재미있는 유쾌한 친구들의 사건해결기라고만 생각하고 책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내용이... 아 정말. 

 

소규모의 도시인 크리스이안순에 살고 있는 단 소메르달과 플레밍 토르프는 막역한 친구 사이이다. 단 소메르달은 잘 나가는 광고대행사 임원이고, 플레밍 토르프는 경찰이다. 단은 최고 자리까지 갔다가 번아웃으로 지금 직장도 쉬면서 허덕이고 있는데, 우연히 자신이 근무하던 광고대행사 내에서 한 여자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다. 광고대행사 사람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친구를 도와주게 되었는데 점점 사건에 빠져들게 되고, 플레밍과 단은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조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접점을 만나게 되는데... 그 동안에 죽은 여자와 같이 살던 한 여자의 처참한 시신도 발견되는 일이 있었고 죽은 여자와 함께 일하던 벤야민이라는 젊은 친구와 그 어머니가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단의 집에 머물게도 되고...

 

내용을 요약해보면, 정말 코지 미스터리에 가깝다 싶지만, 읽어나가는 도중에 발견된 것들은 참혹한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 덕분에 나는 금방 해치울 줄 알았던 이 책을 삼일이나 잡고 읽어야 했다.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말이다.

 

 

"그래요, 그 사람이 가끔 때린 적은 있어요. 그런데 술을 마셨을 때만 그랬어요. 술이 깨고 나면 정말 잘못했다고 사과했어요."... (중략)... "자, 그러니까 단, 사실은 아주 끔찍한 이야기야. 여성과 아동 폭력에 관한 얘기인데 그게 결코 단순하지 않아. 중대한 차이점 한 가지는, 벤야민의 아버지 욘이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고 그 탓으로 세 번이나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거야. 처음에 자기 부인 학대로 3개월 형을 받았는데 여성보호센터에서 은신하고 있던 앨리스와 아이들을 공격했어." ... (중략) ... "요약하자면, 욕이 갑자기 필립을 낚아채서 자동차로 데려갔어. 앨리스가 뒤따라 뛰어갔지만 욘이 훨씬 빨랐어. 금세 필립을 조수석에 앉히고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가버리고, 앨리스가 오기 전에 시동까지 걸고, 욘이 주차장을 나가는 걸 보고 앨리스는 지름길로 가서 욘을 못 가게 막으려고 했어. 그런데 차 앞으로 달려오는 앨리스를 보고도 그는 멈추지 않았어. 브레이크 한 번 밟지 않고 그냥 가속페달을 밟아 들이받고 가버린 거야. 앨리스는 피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길바닥에 쓰러졌고." (p158-162 중 인용)

 

 

그러니까 이 정도 읽으면, 이전에 읽었던 <페미사이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술 먹고 폭력을 휘두르고 법으로 떨어뜨려봐야 수 개월에서 수 년. 다시 돌아와 찾아서 또 패고 납치하고 강간하고... 죽이고... 밟고 때리고. 이 책이 덴마크 작가가 쓴 건데 말이다. 덴마크에도 역시, 그런 복지국가에도 역시 그런 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남자의 아내는 그의 소유property 라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악과 고통의 치명적인 뿌리다. 모든 잔인한 남자들, 그리고 삶의 다른 관계에서는 잔혹함과 거리가 먼 수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는 자신의 물건thing이라는 생각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이런 남자들은 분개하면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못한단 말인가?" 라고 물을 준비가 되어 있다. (p101)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폭력은 여성들의 삶에 만연해 있는 특징이다. 이것은 남성 우위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성을 구성하는 데 폭력이 핵심ㅇ르 이룬다는 걸 확실히 주장하려는 것이다. 드워킨이 주장하듯, 남자가 되는 과정에서 소년은 폭력에 적극 참여하도록 사회화된다. (p508)

 

<페미사이드>에서 이야기되었던 수많은 폭력의 사례들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큰일이다. 이렇게 소설에 만연해 있는 가정 내 폭력이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폭력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 책이 떠오르고 그래서 속에서 분노가 쌓이니 말이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혼외 관계를 하는 여자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지 못 들어봤죠? 성폭행을 당했든 노예로 유럽 집창촌에 팔려왔든 개의치 않는다는 거 알아요?"

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봐서 알고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한 여자가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볼 적이 있어요. 맹세컨대 난 절대 안 돌아가요."

(p212-213)

 

 

덴마크에서 성매매활동을 하거나 그런 활동을 하다가 관련 정보를 제공한 여자들은, 한동안(100일?)만 머물다가 본국으로 송환된다고 한다. 피해 여성들은 본국으로 송환되는 즉시, 공항에서 다시 그 포주 내지는 주인에게 끌려가서 심하게 맞은 후 다음 비행기로 다시 덴마크에 돌려 보내지고 거기서 다른 위조 여권을 가지고 다시 성매매를 하게끔 한단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되나?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법이 그러하니 그럴 수 없다는 거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 그 여성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 그대로 살거나 그렇게 살다가 매질로 죽거나, 도망치려다가 잡혀 죽거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포주에게 얻어맞은 여성들 사진을 비롯해서 항문 성폭행으로 인해 직장이 파열된 어린 여성 사진, 온몸이 담뱃불로 지져 생긴 화상 흉터투성이인 여성들 사진도 있었어요. 그 여성들은 모두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죠. 외국 여성이라는 것, 크리스티안순에 몰래 숨어 산다는 것, 그리고 덴마크에서 추방당할까 봐 무서운 나머지 어떤 형태든 관청에 도움을 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p295)

 

"나는 그의 집에서 4일을 지냈어요. 그는 내가 저항을 멈출 때까지 몇 번이고 나를 성폭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어요.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자 나를 때리는 일도 줄어들었고 내게 먹을 것도 줬어요. 그의 집에 오는 친구들도 섹스를 하고 싶어했어요. 이제 이러나저러나 나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신경을 끊어버렸죠." (p304-305)

 

 

이런 여성들을 돕는 단체가 있었고 암암리에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디나 마찬가지로 그 속에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의 이득을 철저히 취하는 사람들, 자기 살자고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회의 변방에서 학대받고 고통받던 여성들은 다시 또 다른 이유로 살해되고 사라져 갔다. 이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내내, 분위기가 음산하지는 않았지만 내용 자체는 참으로... 참기 힘들었다.

 

소설을 읽을 때 관점이 많이 바뀐 것을 요즘 절실히 느낀다. 여성주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수많은 소설에서 접했던 낭만도 폭력이 (낭만은 개뿔) 되어버렸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이 말 그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로 다가와 소설 내용에서 너무나 도드라져 보인다. 가끔은 작가의 관점 (이 책은 그런 관점은 아니었다. 플레인한 기술이었고 사회 현실에 대해서 담담하게 그리고 너무 비참하지 않게 쓰고 있을 뿐이다)에서 남성성이나 가부장제의 느낌이 너무 들어 읽기 싫어질 때도 있다. 이전에는 내가 좋아했던 작가임에도. 어쪄면 소설은 소설일 뿐인지라 포장이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속에 투영된 현실이 가끔 너무나 암담하다. 좋은 연휴에, 이 생각 저 생각 머릿 속에서 많이도 스쳐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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